◆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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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앞서 올린 소장(疏章)에서 이미 무엇을 할 만한 재주가 없음을 아뢰었습니다. 하지만 성은의 헤아려 주심을 받지 못하였고 신에게 부임할 것을 재촉하였기 때문에 민망하기 그지없어 두려움을 무릅쓰고 시세로 보나 형편으로 보나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외람되게 거듭 아룁니다. |
지금 두 이웃 나라 사이에는 알력이 생겨 당장 전쟁을 할 듯이 서로 노려보고 있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담장을 사이에 두고 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우는 것 같으니 그 포효하는 기세와 격투하는 근심은 반드시 우리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그러면 서쪽 방면이 그 충돌에 맞닥뜨려 맨먼저 짓밟히리라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라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때에 국가의 안녕을 보장할 책임은 변방 관리에게 지워져 있습니다. 예로부터 국가의 안녕을 보장한 사람들은 반드시 먼저 인화(人和)를 이룩하였습니다. 인화를 이룩하려면 우선 반드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며 생업을 즐기도록 함으로써 윗사람을 부모처럼 여기고 어른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마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의 안녕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
지금 서쪽 방면의 상황을 보면 재물이 고갈되고 백성들은 곤궁한 처지에 놓여 있는데, 곤궁에 빠져 귀의할 곳이 없는 자들은 서교(西敎)에 투신하지 않으면 동학(東學)에 들어갑니다. 뿐만 아니라 흰 옷을 입은 무리들의 요사스러운 주문을 집집마다 외우고 녹림(綠林)의 포악한 도적들이 고을마다 횡행하는 것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무리들이 이토록 불어난다면 이 외환(外患)의 기세를 타고 내란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더구나 압록강(鴨綠江) 일대의 자성(慈城), 후창(厚昌) 여러 고을에서는 청(淸) 나라 비적(匪賊)들이 날뛰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고장을 떠나려 하고 초산(楚山), 벽동(碧潼) 등지는 러시아인들이 벌목을 구실로 연안에서 깊숙이 들어와 안쪽 지대를 불법으로 차지하였습니다. 여러 도(道)의 형편을 총괄해 보건대 하나도 해낼 만한 것이 없습니다. |
이런 때에 변방 연안 수령(守令)으로서 공정하고 청렴하며 강직하고 밝은 인재를 얻는다면 혹 만회하고 유지할 계책을 실행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불가능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신이 지난해 처음으로 부임하였을 때 관하의 수령(守令)들 가운데는 근무 평가에서 하등(下等)을 맞은 자로서 어떤 이는 포계(褒啓)를 도모하여 그냥 눌러 있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안쪽 지대로 옮겨 앉아 죄를 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관찰사(觀察使)의 전최(殿最)는 역시 쓸모없는 것이 되고, 선한 이를 장려하고 악한 자를 징계할 방법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 폐단은 틀림없이 탐오(貪汚)하는 데 거리낌이 없고 할박(割剝)을 자행하는 데까지 이르러서, 백성들이 연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법마저도 시행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신이 비록 억지로 다시 부임하려 한들 무슨 낯으로 백성들을 대하겠습니까? 이것 역시 못할 일입니다. |
어느 모로 보나 시세와 형편상 해낼 수 없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폐하(陛下)의 간택(簡擇)을 거듭 욕되게 하면서 해낼 수 없는 재주를 가진 신에게 해낼 수 없는 일을 억지로 맡기시니, 신은 실로 황공하오나 절대로 외람되게 부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처럼 거듭 간절한 심정을 아뢰니, 엎드려 바라건대 황상(皇上)께서는 곡진히 살피시고 앞서 올린 청을 허락하시어 공무(公務)와 국사(國事)를 복되게 하소서.” |
하니, 비답하기를, |
“폐단을 잘 아는 이상 속히 바로잡아야 할 것이며, 또한 모름지기 경은 높은 명망을 지니고 있으니 그것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번거롭게 굴지 말고 속히 떠나도록 하라.” |
하였다. 공민왕 이 경대부(卿大夫)들로 하여금 과녁에 활을 쏘게 하고 친히 이를 구경하는데, 태조 가 백 번 쏘아 백 번 다 맞히니, 왕이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오늘날의 활쏘기는 다만 이성계(李成桂) 한 사람뿐이다.” 하였다. 찬성사(贊成事) 황상(黃裳) 이 원(元)나라 에 벼슬하여 활 잘 쏘기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순제(順帝) 가 친히 그 팔을 당겨서 이를 관찰하였다. 태조 가 동렬(同列)들을 모아 덕암(德巖) 에서 과녁에 활을 쏘는데, 과녁을 1백 50보(步) 밖에 설치했는데도 태조 는 쏠 때마다 다 맞히었다. 해가 이미 정오(正午)가 되어 황상(黃裳) 이 이르니, 여러 재상(宰相)들이 태조 에게 홀로 황상 과 더불어 쏘기를 청하였다. 무릇 수백 번 쏘았는데 황상 은 연달아 50번을 맞힌 후에도 혹은 맞히기도 하고 혹은 맞히지 못하기도 했으나, 태조 는 한번도 맞히지 못한 적이 없었다. 왕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 이성계(李成桂) 는 진실로 비상한 사람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내부(內府)의 은(銀)으로 만든 거울 10개를 내어 80보(步) 밖에 두고, 공경(公卿)에게 명하여 이를 쏘게 하되, 맞힌 사람에게는 이 거울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태조 가 열 번 쏘아 열 번 다 맞히니, 왕이 칭찬하며 감탄하였다. 태조 는 항상 겸손(謙遜)으로 자처(自處)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윗자리에 있고자 아니하여, 매양 과녁에 활을 쏠 때마다 다만 그 상대자의 잘하고 못함과 맞힌 살의 많고 적은 것을 보아서, 겨우 상대자와 서로 비등하게 할 뿐이고, 이기고 지고 한 것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비록 구경하기를 원하여 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살 한 개만 더 맞히는 데 불과할 뿐이었다. 2008년 마지막 날. 제30조(사적이용을 위한 복제) 제31조(도서관등에서의 복제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