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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지우(知己之友)

* 딸을 버렸었다!

오늘 강화를 다녀왔다.
강화를 가던 중이었다.
작년인가 딸하고 같이 가던 길이었다. 예전에 조금 먼 곳을 가면 꼭 아낼 데리고 다니던 습성도
작용했지만, 강화 가는 길이 삼포 가는 길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 뭐 아무리 먼 길도 출발하면
그런대로 또 가게 되는 것은 우리네 인생을 돌아보면 알 수 있기도 하다.
10대/20대/30대/40대 등을 마디마다 돌아보면 더욱 출발과 끝을 살필 수 있으리라.
그땐, 딸 아이가 방학하여 집에 있었다. 슬쩍 떠봤다.

"현민아! 아빠하고 강화에 가자"
딸이 말했다. "아빠, 혼자 다녀오세요."
여느 때처럼 나서려 하지 않는다. 혼잣소리를 했다.
"니 엄마가 있었으면 두말하지 않고 쫓아 나섰을 텐데..,"
그리고 두어 마디 더 장난스런 말을 주고받았던 것 같다.
출발하려는데 딸이 그런다.
"아빠, 같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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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다! 신났다!                                                                                                                                                                 딸 아이 학교에 회의나 모임이나 축제 때 내려갔다가 올라오려면 옆자리의 허전함에 장거리 운전이 더욱 피곤하곤 했었다.

아내와 참 많은 곳을 같이 다녔다. 일요일 없이 일할 때도 따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기에 일요일엔 아내와.., 아들이 태어난 후는 아들과 딸도 태어난 후엔 딸까지 데리고 여러 곳을 다녔다. 의정부처럼 거리가 먼 곳은 일부러 더 아낼 데리고 다녔다.

가다가 코스모스 앞에서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하고 의정부 신시가지가 막 조성될 때, 거래처에 물건 배달하곤 잔디 깔린 곳이든 넓은 터든 가리지 않고 아이들 사진 찍어주고 예쁜 아내의 미소를 즐기며 즐겁게 지내곤 했다.
 

아이들 사진을 찍을 땐 설사 양복을 입고 있을 때도 땅바닥에 주저 없이 엎드리며 사진이 잘 나올 구도를 잡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고도 아낸 한 번도 옷 버린다고 타박한 적이 없다. 그야말로 나를 왕으로, 절대군주로 대했고 나보다 긴 아내가 내게 스스럼없이 기대오던 믿음을 나는 즐겼다. 그리고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려 노력을 했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예식장이든 환갑잔치든 회사의 행사가 있든 기회만 되면 아낼 데리고 다녔다.
다른 대리점 사람들에게 "오 사장은 말이야."하고 삼정식품 김 회장도 툭하면 내 이야길 하곤 했다.
여름에 그 바쁜 때 김용삼 회장이 그랜저(그땐 그 차가 최고급 차였다.)에 나와 아내와 아들만 데리고 자기가 운전하여 도봉산에 가서 한나절을 즐기고 올만큼 인정을 받기도 했다. 아내가 착한 덕이기도 했다. 결혼생활 7년 투병생활 1년 동안 한 번도 부부싸움을 하지 않은 것은 때론 모나기도 한 내 성격과 달리 공 같은 아내의 인내도 큰 몫을 했으리라. 학부모 소개로 아낼 만난 것은 전화가 처음이었다. 당시 처가는 녹번동에 집이 있었고 장인의 사업이자 가업인 철물업 때문에 대천에 자릴 잡은 지 오래된 터였다. 그리고 전화가 이어지고 아내에게 처음 편지를 보낸 전문을 기억한다. 엽서에 "예전에 어느 소녀는 내일은 오늘과 다르기를 바랐습니다."라고 써 보냈다. 그리고 장모님과 아내의 이종사촌을 장안동에서 처음 만났을 때 장모님께 "어머니"라고 스스럼없이 불렀는데 나중에 장모님 말씀이 내가 "어머니"라 불렀던 것에 마음을 빼겼다고 고백하시더라.

 김포 읍내에 들어서서 딸이 무얼 사자고 한 것 같다.
"네가 가서 사 오려무나"하곤 딸이 제법 큰 슈퍼 비슷한 곳에 물건을 사러 들어간 사이 장난기가 발동했다.                  슬그머니 차를 100여 미터 강화 쪽으로 굴러 가지고 딸이 차를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겨놓곤 꽃나무 뒤에 숨어서 딸의 동태를 엿봤다. 한참만에 나온 딸이 차도 아빠도 없는 것에 황당해하고 있는데 장난을 심하게 했다. 10여 분을 더 딸의 하는 짓을 지켜보며 혼자 킥~~킥~ 꺼리고 있었다. 그런데 참 많이 컸더라. 별로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다음 수순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같이 가던 일행이 그것도 아빠가 자동차와 함께 종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 아빠의 장난이라고 생각할까?
어쨌든 '딸을 버리므로 해서 즐거운 추억을 한 자락 깔았다.'

올여름 방학 때
호주학습을 떠나기 전에 또 그랬다.
"현민아, 아빠 강화 가는 데 같이 가자." 
의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싫어요!, 나 또 버리려고?"

하하하, 웃으며 또 독백 같은 소리가 나왔는가 보다.
"네 엄마
있었으면 같이 따라 나섰을텐데..,"
딸이 그랬다.
"그때도 그 말에 내가 쫓아갔었는데..," 
      

그랬었구나! 속 깊은 딸인 줄 알고 있었지만. 놈은 그랬다.
몇 번 안 써먹은 "네 엄마가 있었으면..."이란 말이 놈의 가슴을 찔렀던 것이다.
많이 컸구나! 언감생심 아이들 어렸을 때는 이런 말도 입 밖에 내 논 적이 없다.
엄마의 부재 탓에 힘든 사항을 토~옹, 내색하지 않던 아이들이었는데
4학년 초쯤, 일기장 한구석에
"나도 엄마가 있었으면..'하는 낙서를 단 한 줄 해 놓은 것을 보고 참 많이 울었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아이들 마음의 상처를 덜어주는 일이라면
아무리 혹독한 대가라도 감수하고 아무리 많은 이익을 주는 일이라도 포기했다. 아이들 처지에서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엄마가 섬 그늘에~~] 즐겨 부르던 노래도 아이들 앞에선 불러 본 적이 없다. 이젠 컸으니 흥얼거려도 될 성싶기도 하다. 이렇게 아내는 내게서 많은 것을 가지고 갔다.
집에서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소주 한 병 가지고 한 달을 살 정도로. 세월이 가서 한참 일할 나이에 운신을 못한 족쇄가 되고 그 여파로 좀 더 큰 것을 이루지 못한 아픔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었으니 후회는 적게 하고 있다.

누가 물으면 그랬었다. '마누라 도망갔어요'라고...  
오늘은 먼저처럼 엉덩이를 까서 보여주는 할망구도 없을 터인데.
그래, 출발하면 또 다른 즐거움이 있을 거야. 오후에 강화에 간다.   
                                                         

                                                                                                            2006.09.08

                                                                                                                                                                                                                                                                                                                            

글: 매조지  그림:D/부자방/에이훠에이/Catalog 24/15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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