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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시대 흐름(時流)

◆ 태평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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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물처럼 순수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순수란 이름은 나이에 따라 색깔을 달리한다.



북부간선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성수대교나 용비교를 타고서 강남역에 가려던 참이다.

성수대교와 동부간선도로를 같이 탈 수 있는 갈림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잡념에 빠졌었는지 30년 차에 이르는 운전미숙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순식간에 지나쳐 버린 거다. '한남대교를 건너야겠군' 하고 생각했다.

아뿔싸! 그런데 빠지는 길이 없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러다간 마포대교도 지나치고 서울 외곽을 한 바퀴 돌겠다 싶었다.

용산 못 미쳐서 빠져 미군부대를 지나 이태원을 거쳐 약수동으로 접어들었다.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이르자.

잊고 있었던 옛날 일이 떠올랐다. 기억은 언제나 이렇게 불현듯 떠오른다.

한남동 운전면허 시험장이 있던 모퉁이에서 보광동 쪽으로 몇백 미터쯤 가면

왼쪽으로 태평 극장이 있었다.


1968년 중학교 1학년이었다.

윤모라는 동급생을 꾀어서 본 영화가 '공룡 백만년' 이었다.

지금 보면 아마 유치한 줄거리에 조잡한 화면이겠지만

지금도 화면 가득 포효하던 공룡(화석파충류를 한데 묶어 '디노사우르'라고 한 것을

동양에서 ‘공룡’이라고 번역했단다.)의 모습이 선명하다.

 극장에 가는 것조차가 정학 사유가 되는 참 더러운 세상이었다.

(지금의 아이들은 귀를 뚫고 코를 뚫어도 이미 꼰대가 된 나는 자~ㄹ 이해한다.

때론 인정하기 싫을 때도 있긴 하지만...

심지어 딸과 아들을 미장원에 데리고 가서 염색과 탈색을 해 주기도 했었다.

아들이 고2 때 하고 싶어 하기에 방학 때 불과 20일 정도를 위해 기꺼이 거금을 들이기도 했었다.

딸은 귀를 뚫든 혓바닥을 뚫든 염색을 하든 학생들의 존재를 깍듯하게 인정해 주는 학교에 보냈는데도

코를 뚫거나 그러진 않더라. 딸 친구 새벽 이는 혓바닥에 방울까지 달았는데..)


 그때, 학교가 신당동 산마루에 있었는데 동대문 운동장(당시엔 서울운동장)도 놔두고

차로 한 시간 반 이상 걸리는 효창운동장에 가서 체력검사를 했었다.

왜 그랬는지는 내가 교장이 아니고 선생이 아니었기에 모르겠다.

그런데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학교에서 효창운동장까지는 한시간 반의 거리였지만 집에서는 두 시간 거리였다.

 아침에 서두르다가 운동모자를 잊고 갔다.

그런데 '이사형'이라는 담임이 체력검사라는 본래의 목적은 잊어버리고

운동모자를 쓰지 않고 왔다고 집에 가서 가져 오란다. 제정신이 아닌 놈이었다.

집에 갔다 오면 한나절이 다 갈 테고 체력검사는 꽝 일터인데

본말이 전도되고만 꼴이다. 체력검사는 그렇다 치고 그게 무슨 교육 효과가 있겠느냔 말이다.

보광동이 집이었던 윤모(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지독하게 내성적이었다)의 집에 들러

모자를 챙기고 금호동인 우리 집엘 갔다 올 생각을 하니 한심하고

'이건 아니다'싶어 친구를 꼬셔 태평 극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이튿날.

선생은 이미 선생이 아니었다.

이름 그대로 사형을(私刑)을 가하는 양아치 일 뿐이었다.

교무실에 불려 간 우리는 행적을 불었고 그날 학교 끝날 때까지

교무실에 서서 수업 끝나고 들어오는 선생마다 한마디에 한 대씩 린치를 당하고 고문을 당했다.

차라리 몽둥이로 타작을 당했으면 쉬 잊고 말았을 터이다.

군대 문화가 사회 전반에 만연하던 그땐. 엎드려뻗쳐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이유없이(?) 단체 기합을 주고 받았던 것이 흠이 아니고

불만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선생님/선생/선생 놈 이란 제목으로 이 내용을 글로 쓴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원본이 없다.

나는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의 담임 선생님 이름과 특징을 다 기억한다.

선생님으로 기억되는 분이 더 많았지만 유일하게 선생 놈으로 남은 '이사형' 이 者는

뼈다귀만 앙상하게 남은 자가 정말 선생이 아니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불쾌감이 앞선다.

 85년 결혼하던 해 직업을 바꾸었다. 학원을 운영하다 장사꾼으로..,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고 마음에서 즐겼는데 제대하고 잠시 회사생활을 하다

다시 천직이라고 학원을 하던 내가 어느 날부터 학생들 머리 숫자가 돈으로 보이기 시작한 거다.

'그래, 돈을 벌려면 장사가 맞는 거야'라는 단순한 논리로

하루아침에 학원을 접었고 생경한 분야인 지금 하고 있는 일판에 뛰어들었다.

이미 안정되어 있던 업을 차 버리고 어설프게 뛰어든 곳은 가시밭길 이었다.

그때 내세운 상황논리가 '어려운 일은 어렵다는 이유만으로도 극복할 가치가 있다.'라는 명제였다.

나도 나였지만 안사람이 마음고생 좀 했을 거다. 자리 잡기까지 3년이 걸렸었다.



글:매조지  그림:D/에이훠에이/[고해상도] 물 (순수) 이미지
출처:http://planet.daum.net/maejoji/ilog/4299746

200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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