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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시대 흐름(時流)

◆ 백바지의 추억

솔나무를 갉아먹는 송충이마냥 매조지는 요즈음에 세월만 갉아 먹고 있다.

세월을 갉아먹는 재민 밋밋하기만 하다. 수입 쇠고기가 선뜻 손이 가지않듯 리기다소나무의 맛이 이럴 것 같다.

높이가 25m에 이르고 폭이 1m에 이른다는 북미 원산의 솔나무 둥치는 커녕 솔잎도 맛 본 적이 없어 토종 솔나무의 잎과 어찌 다른지 모르겠으나 재래종 솔나무의 맛과는 확연히 다를거라 생각이 든다.

꾸부정꾸부정한 본종 솔나무와 달리 미끈하게 거침새없는 모양이 보기엔 좋으나 먹거나 맛을 보기엔 별로일 것 같다. 경험에 의하면 미끈하게 잘 빠진 여자가 무미건조(無味乾燥)한 경우가 심심치 않았으니 말이다.

비유가 적당치는 않지만 맛도 못 본 '리기다 소나무의 잎만큼 맛이 없는 세월'을 보내는 것이 한심하고 서러워 주절거려 보았다. 그런 심보로 플래닛에 끄적이던 짓도 한동안 삼가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백바지의 추억'이란 제목으로 이야길 꺼내려는 의도와 달리 '세월을 갉아먹고 있는 회한(悔恨)으로 엉뚱한 말을 하고 말았다. 방향키를 틀어 보자.

 ' 백바지'는 하얀 바지를 가리키는데 우리 자랄 땐 멋의 대명사이기도 했었다. 백바지에 백구두 등으로 치장한 경우도 있었다. 백은 白을 이름이니 곧 하얀 색을 말하는 <백색>의 준말이고 <백지>의 준말이기도 하다.

백은 '아무것도 없다' 는 뜻으로도 쓰인다. 속어로 '백ㅂ지'란 말은 여자의 거시기에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뜻하기도 하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 여기까지 아무런 뜻없이 생각나는대로 주절 거린 것이다. 물론 아래의 글도 내용이 없기는 마찬가지 일 것이지만...서명화 씨의 백바지에 기록한 것으로 인해 '인간'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


탈레반에 피랍되었던 서명화 씨가 백바지에 피랍생활의 일부를 자신이 입고있던 백바지에 기록했단다.

언젠가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찰나와 같은 순간에 가족들에게 남기는 글을 적은 일본인 승객의 기사를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인간이기에... 기록을 하는 재주가 있는 것이지만, 절대 절명의 순간에도 본능으로(?) 상황을 남기는 인간의 본질은 무얼까? 하는 생각을 하게하는 사건이었다. '인간의 본질은 영혼이다'고 백과사전에 정의해 논 것에 동의한다. 영혼의 고귀함이 생의 불꽃이 타는 마지막 순간에도 기록을 남기게 한다.

(숯한 비난이 있는, 정치집단화하고 건물 등의 외형만 커 버린 기독교의 많은 문제는 여기서 다루고 싶지 않다.)그런 면에서 살아와 다행인 (혹 죽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해도) 서명화 씨의 행위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탈레반, 한국인에게 보내는 성명 발표"


탈레반은 성명에서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을 돕기 위해 200여 명의 병력을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와 이들을 납치했다고 밝혔습니다.
인질 가운데 두 명이 살해된 것과 관련해 아프간 현 정부와 미국이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는 한국 정부가 전적으로 책임질 문제라고 주장했다고 AIP는 전했습니다.

 

윗 글을 쓰면서 뉴스를 검색하니 위의 내용이 눈에 띄네요.

인질들이 살아오길 바랐고 살아와서 다행스럽긴하지만, 국가의 체면과 권위는 엉망이 되었고 한때 집권세력이었다곤 하지만 떼강도 수준으로 전락한 탈레반의 무장괴한 들에게 국제 사회에서 전세계 10위권에 든다는 한국이 그들의 지위를 격상하는 조력자 역활을 한 것은 못내 아쉽다. 게다가 탈레반 치들이 한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 내 원하는 바를 성취하곤 '위대한 승리'라며 아래와 같이 밝혔다고 한다. 기가 찬다.


 '카리 유수프 아마디 탈레반 대변인은 31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인 납치는 성전을 수행하는 우리 전사의 위대한 승리”라고 자평했다. 이어 “우리는 이 방법이 성공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프간의 다른 우방에도 똑같은 일(납치)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42일동안 하루도 빠지지않고 뉴스에 오르고 앞으로도 한동안 이어질 그래서 내가 아는 만큼 모두 알고있는 이야긴 여기서 접도록 한다. 다만, 탈레반도 인간이고, 피랍자들도 사태의 진행을 지켜본 전 세계 사람들도 같은 인간의 범주에 속하니..차제에 [인간]을 한 번 돌아 보는게 더 값 있을 것 같다.

 

● 인간 (인류학)  [人間, human being]

철학사에서, 생물학적 현상이나 사회적 현상으로 또는 종교적·인격적·이성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존재.


인간의 고유한 특징으로는 영혼·사유·노동·유희·소비·도덕 등이 제시되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세계와 우주의 본질을 탐구했는데 이러한 존재 질서에서 인간은 중심 위치를 차지했다.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이지만 인간의 본질은 영혼이다. 신화적·종교적 세계관에서는 영혼이 천상에서 물질 세계로 추방되어 육체에 갇혀 있지만 세계보다 참된 것이라고 보았으며 여기에서 이원론적 사고가 마련되었다.
소피스트는 자연철학에서 벗어나 인간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했으며, 인간을 세계의 보편법칙인 로고스를 지닌 존재로 보는 데 반대하고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삼았다.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와 규범을 인정함으로써 소피스트의 상대주의를 극복했다. 그에 따르면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감각세계의 변화를 넘어서 영원하고 변치 않는 이성적 진리를 알 수 있다. 이런 사고는 고전적인 형이상학에 연결된다. 플라톤은 감각적인 가상세계를 넘어서는 지적인 정신세계를 실재라고 본다. 인간의 영혼은 변화하는 세계를 초월하여 불변하는 이데아의 세계에 속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이 이성을 지니므로 다른 존재보다 우월한 것으로 본다. 그는 질료와 형상 원리에 따라 인간의 영혼을 육체의 형상으로 보고 영혼과 육체의 결합을 추구했다.
중세시대에는 그리스도교에 기초하여 인간을 신적(神的) 질서의 일부로 이해했다. 인간은 신이 창조한 인격이며 신을 추구함으로써만 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자유의지를,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유와 사랑보다 지성을 강조했다. 종교개혁 이후 신앙이 부여한 통일이 무너지고 인간은 세계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떨어져 방향과 안식처를 잃은 존재가 되었다. 근대에 들어와 인간은 객관적인 존재질서의 중심이 아니라 주관적 인식의 중심이 되었다(주관으로의 전환). 르네 데카르트는 의식의 순수한 자기 확실성을 확고부동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모든 사물에 앞서 자신을 사고하는 자아는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순수한 이성이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 사유하는 의식과 연장(延長)을 지닌 육체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실체'라고 본다. 이러한 영혼과 물질의 단절은 근대 철학을 일면적으로 만들었다. 정신만을 강조하는 합리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사유하는 주관으로 축소시켰고 경험론은 경험과 물질에만 매달린다.
이마누엘 칸트는 양자의 대립을 넘어서고자 했다. 그런데 대상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이성을 추구하는 칸트의 선험철학(先驗哲學)은 인간의 통일과 전체성을 이루는 데 실패한다. 그는 감각적 직관과 개념적 사유, 이론적 인식과 실천적 행위, 지식과 신앙의 대립을 통일하지 못했다. 칸트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이러한 질문은 형이상학·도덕·종교에 기초해서 인간학을 확립하려는 것이다. 독일 관념론은 절대적 자아와 절대정신을 추구하여 칸트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인간의 전체성은 세계와 역사 안에서 절대자의 변증법적 자기발전으로 파악된다.
18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자인 라 메트리, 디드로, 달랑베르, 홀바흐 등은 인간의 정신적 본질을 부정하고 인간을 물질 체계의 한 현상으로 본다. 19세기 실증주의의 창시자 오귀스트 콩트는 인류가 신학적·형이상학적 단계를 거쳐 실증적 단계로 발전한다고 본다. 실증적 단계에서는 세계를 실증적·과학적으로 탐구하여 실재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는데, 이때 인간은 자연과학·경험심리학·사회과학의 대상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역사를 유물론적으로 해석한다. 그는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물질적 생산을 통해 세계를 만드는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사회공동체 안에서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살면서 의식을 갖추고 물질적·정신적 활동을 하는 사회적 존재이다. 그런데 계급사회의 인간에서 생활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와 거기에서 생기는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적대적인 계급으로 분열된다. 이때 인간은 계급적 개인이고 소외된 개인이다.
인간을 보편적인 존재로 보기를 거부하는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을 문제삼는다. 이것은 자기의 고유한 경험, 유일성과 독립성, 자유와 책임에서 개별적인 인간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무기력과 좌절, 죄와 불안 속에서 자기를 경험하는데 신과 마주섬으로써만 자기 실존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이와 반대로 자연적 인간과 그 생명력을 중시하면서 그리스도교를 비판한다. 그는 삶을 고양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교의 '노예도덕'을 버리고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다. 생(生)철학자인 베르그송은 실증주의와 유물론에 반대해서 끊임없이 운동하고 성장하는 삶에 주목한다. 이것은 생명의 약동에 의해 창조적으로 진화한다. 그것은 합리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고 직관으로 체험해야 한다. 이런 흐름은 실존주의에 연결되어 카를 야스퍼스는 실존의 해명을 통한 초월을, 마르틴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실존론적·존재론적 해석학을, 사르트르는 의식의 현상학을 펼친다.
인간에 관한 논의는 철학적 인간학의 중심이다.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은 막스 셸러에 의해 기초가 마련되었는데, 그는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 Die Stellung des Menschen im Kosmos〉(1928)에서 인간과 동물의 행동을 비교하고 인간의 '세계개방성'을 동물의 '환경에 구속됨'과 구별하여 인간의 지위를 정신에서 찾는다. 아르놀트 겔렌은 경험과학을 인간학 관점에서 종합하여 동물이 고도로 전문화되어 있고 확고한 본능을 지닌 데 비해 인간은 전문화되어 있지 않은 '결핍 존재'임을 밝히려고 했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 그 결핍을 보충해야 했고 그리하여 높은 정신적·문화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본다. 이와 달리 아돌프 포르트만은 생물학과 비교행동 연구에서 인간이 이미 생물학적으로 정신적·문화적 성취와 인격적·사회적 관계, 즉 '인간적인'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고도로 '전문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헬무트 플레스너는 인간이 자기 삶의 중심을 거듭 반성하고 이를 초월해서 '탈중심'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동물의 '중심성'과는 다르다고 본다.
 
출처-백과 사전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있긴 한건가??


2007/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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