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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주체/옷주제/잘 자고, 잘 놀기

* 설거지


우리 집 설거지는 내가 도맡았다. 방학하여 집에 온 딸도 설거지는 아예 할 생각을 안 한다.
몰아서 연 며칠 딸이 하는 수가 있고, 내가 본의 아니게 게으름 피울 때, 집에 돌아온 아들이 설거지하는 때가 있기는 해도 거의 도맡아 설거지하는 것은 나다. 심지어 지난주에 학교 기숙사로 돌아간 딸은 나갔다가 돌아와서 설거지거리가 수북하게 쌓여 있으면
 
'아빤, 집에서 뭐 하신 거예요. '하며 타박을 하곤 했다.
귀가 막히고 코가 막혀 눈도 안 떠지지만, 감히 대꾸도 못 하고 눈만 끔뻑거리는 내 모습이 한심하다.
하지만, 한심한 내 모습을 스스로 즐기고 있기도 하다. 아이들 어려서는 아이들이 크면, 설거지는 내 몫이 아닐 줄 알았다. 세월이 아이들을 무럭무럭 자라게 하기만 바랐던 것은 착오였다.
 혼자 생업과 학교 쫓아다니기와 급식 당번, 아이들 옷이나 운동화 등을 사 주러 동네 시장에 갔다가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하면, 그 길로 동대문까지 데리고 나가서 아이들 마음에 드는 것을 구해 줄 때도 아이들이 크면, 조금은 편할 줄 아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확실하게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새삼 깨달았을 뿐이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았단 말이다. 

 군대처럼 단체 생활 하는 곳에서는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솔선수범> 앞에 나서서 했었다.
동기들이 나를 기억할 때, 첫 마디가 <솔선수범>이었었다. 이왕 할 것이라면 고참들 눈치 보며, 어떻게 빠져나갈까 비굴하게 눈치 보는 것보다 앞장서서 하는 것이 낫다는 주의이다. 그랬더니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오더라. 빤질빤질 궂은일은 안 하려는 놈은 시키고 앞장서서 나서는 나는 만류하더라. 
 인생은 그런 것이다. 비겁하지 않아야 할 이유이고, 어떤 책을 통해 아는 것보다 더 짜릿한 체험이기도 하다. 내 글에 내가 겪은 것만 적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좋은 글을 일부러 안 읽는다. 생명이 없는 때도 잦으므로. 

 과일을 깎거나 음식을 하는 것은 서툴다. 서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예 할 생각이 없다. 설거지나 변기 청소, 화장실 바닥 닦기 문짝 닦기 등의 육체적인 노동은 잘한다.
 그런 내가 그녀가 사다 준 복숭아를 껍질 한 번을 중간에 자르지 않고 깎아 냈다. 과일 깎는 자체가 드문 일인 나로선 기록이다. 사과는 깎기가 귀찮아서 물로 닦아 껍질째 먹었다. 그런 나니까 대단한 일을 한 것이다. 인증 샷을 찍고 그녀와 통화할 때 자랑했다. '당신, 과일 깎아 줄 생각으로 깎았더니 거칠긴 하지만, 한 번도 끊어지지 않더라.'라고. 지난 서너 달 동안 그녀가 매주 포도, 복숭아, 사과를 박스로 사왔다. 하지 말래도 계속 이어지는 것에 익숙해져 나중에 덥석덥석 받고 있더라.

 

생애 몇 번 안 깎은 과일을 온전하게 스트레이트로 깎은 껍질의 인증샷. 결국 받아먹는 것에 익숙했단 말이겠
다.
예전에 죽은 아내가 삶은 밤을 알맹이를 티스푼으로 파 준 것을 꼬박꼬박 받아먹기만 한 것이 두고두고 미
안하다.
아내를 생각해서 새로 나와 무덤까지 같이 할 여인에겐 내가 역활을 바꿔 하리라!

나는 설거지를 하기 싫다.
그럼에도 도맡아서 설거지 하는 것은
  '내가 하기 싫은 데, 아이들은 얼마나 하기 싫을까?' 하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사랑, 그것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아이들이나 마누라도 하기 싫을 것이고, 하기 싫은 것을 평생 친구를 생각하여서 하는 것. 그게 사랑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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