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 김재규님 옥중유언
김재규는 사형 집행이 되기 하루 전인 1980년 5월 23일에 자신의 사형집행이 바로 다음날로 다가와 있음을 직감했다. 당시 교도소 관계자들이 주요 재소자 관리를 위해 비밀리에 녹음기를 품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김재규는 유언을 남긴다.
[오늘 얘기는 이 세상에서 내가 남기는 마지막 말이 될 것 같군. 잘 녹음 했다가 역사에 전해주면 고맙겠소]
자신의 운명을 내다본 김재규는 사형당하기 이틀 전인 5월 22일 모친과 부인 등 가족들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면회를 했다. 김재규는 이날 부인 김영희 씨 등에게 <금강경>의 내용을 인용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당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낼 지니라--」이라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고 한다.
마지막 날인 5월 24일 새벽 4시쯤. 교도소 측은 달걀과 사과, 커피를 특별메뉴로 제공했으나 김재규는 손도 대지 않았다. 대신 쇠침대에서 뛰어내리면서 교도소 관계다들에게 손으로 권총 모양과 포승 모양을 지어 보이더니 “어느 쪽이냐?”고 물었다. 교도소 측이 아무 답변을 하지 않자 그는 “안개 피우지 마라. 사나이가 가는 길은 알고 가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하고는 5분간 냉수마찰을 한 뒤 새옷으로 갈아입고 길을 따라 나섰다. 식사를 하지 않고 냉수마찰을 한 것은 이승에 남기고 갈 마지막 흔적을 더럽히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가 형집행 직전 비굴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는 일각의 소문에 대해 당시 관계자들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증언했다. 한 관계자는 “김재규는 전혀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끝까지 의연한 태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형 집행 직전 “남길 말이 있으면 하라”는 검사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훗날 전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전날 이미 자신의 유언을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오늘이 5월 23일, 이른 아침이군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남길 말을 남기고 갈 수 있는 최후의 날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내 소회(所懷)에 있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나는 금번 1심․ 2심․ 3심, 즉 보통군법회의. 고등군법회의. 대법원 재판까지 세 번의 재판을 받았지만 나는 또 한 차례의 재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제4심인데, 제4심은 바로 하늘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변호사도 필요 없고, 판사도 필요 없어요. 사람이 하는 재판은 오판이 있을 수 있지만 하늘이 하는 재판은 절대 오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그런한 재판만이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명확히 얘기 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심판인 제4심에서 나는 이미 이겼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목격했던 민주혁명은 완전히 성공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가 회복이 되고 그것이 보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들 이렇게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미 자유민주주의의 물결은 세차게 흐르기 시작해서 이 나라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있다.’ 이것은 천하 공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로막는 세력이 있어서 순조롭게 민주회복이 돼 나가지 못하고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며 천하의 대세는 사람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기서 이런 비유를 하나 들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던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겠느냐. 오늘날 우리나라의 민주회복에 있어서도 나의 희생 없이 이 나라의 민주회복이라고 하는 것은 ‘확실히 보장되었다’고 이야기하기 힘듭니다. ‘자유민주주의의 고마움을 애절하게 느끼는 부류의 국민들도 있고, 그것을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 부류도 필요하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 부류도 없지 않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죽음, 즉 나의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동시에 자유민주주의가 절대 필요하고 자유민주주의는 절대 회복돼야 하겠구나 하느 것을 전체 국민이 아주 확실히 깨닫게 되고 또 그것을 확실히 자기 몸에다가, 목과 자기 가슴에다가 못 박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번에 나의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기 위한 민주주의 나무의 기름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시간이 된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고 또 보람으로 생각하고 매우 즐겁습니다. 나의 심정을 바로 이해해주는 사람은 나의 뜻을 바로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그리고 내가 명확하게 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내가 집권욕을 가지고 10•26 혁명을 했다. 이러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조사를 담당했던 분들이라든가 혹은 재판을 담당했던 분들, 또 일부 유신체제의 중요한 위치에 밀착되어 있었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명확하게 이야기하지만 집권욕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직 대통령을 희생시키는 일을 하면서 그 국가의 권력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그 집권이라는 문제는 내가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특히 나는 10•26 혁명을 사실은 1973년 10월, 즉 10월 유신이 반포되고 헌법이 반포된 직후에 그 헌법을 보고 그때부터 안 되겠다. 이 유신체제는 독재체제인데 이것을 깨야 되겠다고 이미 발상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 나는 네 차례에 걸쳐서 여러번 이 혁명을 구상했었고, 또 이런 물리적인 혁명에 의한 방법이 아닌, 그야말로 박 대통령 스스로가 이것을 시정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기 위해 수백 번 건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나는 부득이 내 목숨 하나를 바치고 그렇게 해서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추호도 집권욕을 가지고, 집권을 하기 위해서 나의 가장 가까웠던 대통령을 희생시켜 가면서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나의 진의를 그대로 파악하지 못한 인간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백 번 죽어가도, 내가 집권을 하기 위해 대통령을 희생시키고 혁명을 했다는 것은, 내가 하늘에 맹세하고 말하건대, 그러한 일이 없습니다.
아무쪼록 모든 국민들이 민주주의의 고마움, 민주주의의 귀중함, 또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지켜야지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주셔야 합니다. 또 우리가 민주주의를 등한시 하면 꼭 민주주의는 우리 몸으로부터 멀어진다고 하는 것, 그런 경우에는 또다시 많은 희생을 치르지 않고는 민주주의가 회복되지 않는다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를 우리 국민들이 이해해주셔야 됩니다. 나는 국민들에게 이것을 간곡하게 부탁을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 이 대세가 어떤 일부세력에 의해 가로막힌다는 것, 이것은 국가적으로 볼 때, 국민 전체적으로 볼 때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이분들이 빨리 눈을 떠서 감정을 초월하고 정말로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생각해서 자기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어떤 길이 정도이고, 어떤 길이 진리인가 하는 것을 빨리 깨달아서 국기가 흔들리지 않도록 빨리 바로 잡아줘야 합니다. 만일 이것이 흔들리게 되면 정치적으로 혼란이 오는 것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모든 발전의 저해가 되고, 또 국민의 마음은 결국 하나가 되지 못하고 나아가 어떤 불행한 결과를 자아낼지는 누구도 예측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자유민주회복을 위한 우리의 대혁명을 가로막는 이러한 세력들에 대해 진심으로, 마지막으로 진심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사로운 마음을 버리고 개인의 감정을 초월하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더욱 튼튼한 국기를 위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는 것을 똑바로 파악을 하고 판단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안 되기를 희망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나의 희생이 후일 또 다른 희생으로 파생될지 모릅니다. 그러한 불행이 제발 없어지기를 나는 진실로 바랍니다. 소위 민주회복을 하고 난 이후 이 나라의 민주회복이 무엇 때문에 이리 늦어졌느냐, 또 무엇 때문에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병들었느냐, 우리 국민들은 민주회복이 되고난 후에 이러한 여러 문제들을 심판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나는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번에 이 재판의 결과가 나왔습니다만, 참고적으로 하나 말씀 드리겠습니다. 뭐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일본에 과거 5•26 사태니 2•26 사태니 하는 사건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때 그 사람들은 장교들에게만 책임을 지웠지 하사관과 병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사람들이 잘하고 잘못하고 하는 문제를 초월해서 군대라고 하는 조직이 유지되는 데 있어서는 그 역경에서 전쟁을 수행할 적에 부하들이 명령을 선택적으로 받아서 수행한다고 하면, 만일 이러한 기풍이 있다고 하면 군대는 존립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서 부하라고 하는 것은, 상관의 명령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 있는 이런 관계가 아니면, 군대의 명령계통이라는 것은 존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상관이 명령을 했을 때에 이것이 정당한 명령인가 아닌가 판단을 해서 정당할 적에만 내가 이행을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해봅시다. 전쟁에서 만일 어떠한 종교를 독실하게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적을 보고 총을 쏘라고 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정신에 입각해 나는 총을 쏠 수가 없다고 해서 거절했다고 합시다.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조그마한 비유에 불과합니다만,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권을 가진 것이지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안 받아들여지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나는 이번에 이 혁명을 결행하기 위해 내 부하 다섯 명에 대해 강력한 명령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나의 명령을 100%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가지고 아주 완전히 자기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나는 이것은 참으로 본받을 만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적어도 재판과정에 있어서는 이 문제에 대해 명령을 한 나와 명령을 받아 가지고 이행한 이 사람들의 관계는 충분히 정상참작이 돼 판결이 됐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금요일입니다만, 내 영감으로 마음에 잡히는 것은 내일 토요일, 내일이 오전밖에 일이 없으니까 내일 오전 중에 나의 형을 집행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내 영감으로 잡히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염려 없이 아주 유쾌하고 명예스럽게,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자부와, 내가 이렇게 감으로써 자유민주주의는 확실히 보장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즐겁게 갑니다. 아무쪼록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영원한 발전과 10•26 민주회복 혁명, 이 정신이 영원히 빛날 것을 저는 믿고 또 빌면서 갑니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하십시오.
1980년 5월 23일
김재규
[나와 자유]
나를 만일 신이라고 부를 때는
자유의 수호신이라고 부르겠지.
나를 만일 사람이라고 부를 때는
자유 대한의 국부라고 부르겠지.
나 내 목숨 하나 바쳐
독재의 아성 무너뜨렸네.
나 내 목숨 하나 바쳐
자유민주주의 회복하였네.
나 사랑하는 3700만 국민에게
자유를 찾아 되돌려 주었네.
만세 만세 만만세 10•26 민주회복 국민혁명 만만세.
10•26 민주회복 국민혁명 만만세.
10•26 민주회복 국민혁명 지도자
김재규
--그가 육군교도소에서 어머니께 전해달라고 강신욱 변호사에게 부탁한 시.
70년후 1979년 10월26일 김재규는 일본인의 개, 박정희을 쐈다.
김재규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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