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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물

▶ 김점동


한국 여성과학자 1호 김점동

그러면 한국의 여성 과학자의 역사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지난 2001년 연말 <한국여성과학인협회>의 창립 1주년 기념행사에 강연을 하게 되면서, 나는 '한국의 여성 과학자 제 1호'를 누구로 꼽을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한 평생 과학사를 공부한답시고 하고는 있지만, 그 때까지 한번도 한국의 첫 여성 과학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조금 생각해 본 끝에 우리 역사상 최초의 양의(洋醫)였던 김점동(金點童 1879∼1910, 일명 박에스터)을 그 사람이라 결론지었다.

김점동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에 유학하여 1900년 6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지금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귀국했다. 일본의 첫 여성 개업의 오기노보다 15년 뒤에 한국에서도 첫 여성 의사가 활동을 시작한 셈이다. 겨우 100년 전의 일이지만, 그 때까지 한국인으로 대학을 제대로 졸업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몇 명 안 되는 대학 졸업생 가운데서도 그녀는 첫 여성이었고, 첫 여자 의사였으며, 첫 여성 과학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무명(無名)의 여성 과학자인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과학자 퀴리(Curie, Marie 1867.11.7-1934.7.4) 부인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살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김점동은 퀴리보다 10년 뒤인 1877년에 태어나서 67세를 살았던 퀴리보다 훨씬 젊은 33살 나이로 1910년에 퀴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퀴리는 김점동보다 앞과 뒤로 모두 34년을 더 살았던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내가 이 글을 이미 써 놓은 상태에서 일본 첫 여성의사에 대한 소개를 찾아보니, 오기노의 소개에서도 그녀가 퀴리 부인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음을 지적하고 있었다. 다시 정확하게 소개하자면 태어난 순서로는 오기노(1851-1913), 퀴리(1867-1934) 김점동(1877-1910)이지만, 죽은 차례를 보면 김점동-오기노-퀴리로 된다.

김점동은 이들 셋을 비교해도 제일 뒤에 태어나 제일 먼저 죽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한국 과학사의 비극적 전개를 예고하는 대목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국 사람조차 김점동이 누구인지 아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그녀는 아버지 이름만 겨우 김홍택이라 알려진 집안에서 1877년 3월 16일 태어났다.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는 그녀에게는 언니가 적어도 한 명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1882년 조미(朝美)수호조약의 결과로 서양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1886년(고종 23)에 미국 선교사 스크랜턴 부인(Scranton, M.F.)이 서울 황화방(皇華坊), 지금의 서울 중구(中區) 정동(貞洞)에 창설한 것이 이화(梨花)학당이었다.
김점동은 이 때쯤 선교사를 돕는 일을 하고 있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스크랜턴 부인을 만났다. 스크랜턴과의 인연으로 그녀는 이화학당 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어깨 너머로 배운 영어를 잘 하여, 여자 선교사이며 이화학당 선생님이던 몇몇 미국인 여성 선교사들을 도와 통역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김점동은 1893년 박여선(1868-1899)과 결혼했다. 장소는 정동교회였고, 결혼 비용은 이화학당이 부담했다. 당시 이화학당은 이렇게 주선한 결혼이 성사될 경우 비용을 학교가 부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의 결혼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서양식 교회 결혼식으로도 전해진다. 이리하여 조선의 처녀 김점동은 아줌마 박에스터(朴愛施德 Esther Park)가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95년 초 미국 여성선교사 로제타 홀(R. S. Hall)을 따라 미국에 건너갔고, 뉴욕주 리버티에서 영어를 공부한 다음, 9월부터 1년 동안 간호학교를 다니고, 1896년 10월 1일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지금 Johns Hopkins의과대학 전신)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녀는 조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라틴어도 공부하고, 물리학과 수학 같은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1900년 5월 15일 이 대학을 졸업하여 조선인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된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퀴리와 비교하면 참 안 됐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퀴리는 폴란드 바르샤바 중학교의 수학 및 물리학 교사 집안에서 5번째 막내 아이로 태어났다. 어릴 때 정식 이름은 마냐 스클로도프스카(Manya Sklodowska), 그리고 마리아(Maria)라는 애칭을 들으며 자랐고, 언니 브로냐를 따라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1895년 퀴리는 같은 길을 걷던 과학자 피에르 퀴리(1859-1906)와 결혼했다. 김점동이 미국에 건너간 바로 그 해의 일이다.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가 마리 퀴리가 된 것은 이 결혼 때문이었음은 물론이다. 남편 이름을 따라 이름이 바뀐 사실은 김점동이 박에스터가 된 것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세계적 과학자로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고 훌륭한 자식들을 두었던 퀴리와 달리, 1900년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김점동은 정동에 있던 보구여관(保救女館)의 의사로서 맹활약하게 되지만, 자식을 낳아 보지도 못했고, 세계적 과학자로 이름을 남기지도 못했다. 이 병원은 지금 이화여대부속병원의 전신에 해당하는 여성전문병원으로 서양 선교여의사가 경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평양 기홀(起忽)병원으로 옮겼고,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순회, 무료진료를 베풀면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맹아학교와 간호학교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고종(高宗)으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은메달을 받기도 한 그녀는 귀국한 지 10년 동안 약 3천 명의 환자를 돌보았다고 전한다.

이렇게 바쁜 치료활동을 벌이던 그녀는 폐결핵으로 1910년 4월 13일 서울의 둘째 언니(김 마리아)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도저히 객관적으로만 치자면 김점동을 퀴리 부인과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역사상에서만 생각해 볼 때 우리에게는 퀴리 못지 않게 김점동이 중요한 역사상의 인물인 것이다.

좀 엉뚱하지만 나는 김점동을 생각할 때마다 그녀 역시 퀴리 부인 못지 않은 훌륭한 남편을 만났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김점동와 남편 박여선은 함께 미국에 갔지만, 당장 생계가 어려웠다. 뉴욕주의 리버티에서 농장에 취직한 남편은 막노동으로 아내의 의과대학 공부를 뒷바라지했다.

아내와 떨어져 노동만 하던 박여선은 1899년에서야 겨우 아내를 따라 볼티모어로 가서 함께 살면서 식당 일을 얻어 역시 돈벌이에 바빴다. 하지만 그는 이미 폐결핵으로 온전한 몸이 아니었다. 그 후 몇 달 뒤인가? 그는 아내의 대학 졸업을 반년 남긴 1899년 가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퀴리의 남편 피에르보다는 9살 연하였던 박여선은 미국 생활 4년 반을 아내를 돌보는 데 바친 채 병으로 쓰러져 갔다.

'한국의 여성과학자 제1호'로 김점동을 꼽아 보면서 나는 우리가 우리 조상에 대해 너무도 모르는 것이 안타까웠다. 김점동의 일생도 잘 밝혀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남편 박여선에 대해서는 더욱 아는 것이 없다. 퀴리만 잘 알면 그만인가? 우리 조상을 제대로 기리지 않고서는 우리는 훌륭한 후손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출처: 다음 신지식    게시자:컴퓨터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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