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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시대 흐름(時流)

◆ 아버지와 아들

세상에 두 부류의 아버지

이 시대에 아버지는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자신의 아버지를 극복한 아버지와 그렇지 못한 아버지다. 그런 면에서 사춘기 이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아버지의 온전한 모델을 보지 못한 면보다는 극복이라는 과정을 겪지 못한 것이 더 큰문제다. 하지만 오늘날, 봐서는 안 될 아버지상이 너무도 많기에 상대적으로 절망적인 상황만은 아니다.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하면 진정한 어른 아버지가 될 수 없으며, 결국 자신의 아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아버지로 남는다. 아버지를 극복하는 과정은 두 가지로 나눈다. 온전한 극복과 깨부심의 극복이다.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는 기간은 불과 1~2년

절대적이고 일방적인 양육에서 자아의식이 생기고 인격이 형성되는 단계로 접어들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집중을 해야 한다. 이것이 세상의 아버지들이 자신의 아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을 들이는 일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세상의 어른으로서 진정한 사상의 전수자가 되느냐, 아니면 깨부심의 대상이 되느냐는 전적으로 아버지의 선택이자 책임이다.

아버지들은 그동안 가정을 이끌고 세상을 살아오면서 나름대로의 실력을 가지고 이를 닦아왔다. 그런 실력을 자녀에게 전수 할 때가 아들의 사춘기 무렵이다. 그런데 아들의 미숙함과 완벽하지 못함을 탓하고 꾸지람만 하지, 아들과 전략적인 계획을 짜고, 문제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며 함께 실천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갓 태어난 자녀를 위한 아버지 양육 휴가도 좋지만, 자신을 정리하고 사춘기 자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중년의 휴식년제를 국가와 사회적으로 적극 권장 할만하다.


아버지와 아들은 굴욕의 관계가 아니다.

독선과 독재를 일삼는 아버지를 견제 할 사람은 그 속성을 아는 아들 밖에는 없다. 늙어서까지 아버지의 시퍼런 권위가 살아있음은 아들의 견제를 전혀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무력적인 권위가 너무 세거나, 이에 눌려서 무기력해진 아들이 전혀 손을 쓰지 못함이다. 이는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뒤를 이를 왕자를 기꺼이 뒤주 속에 집어넣은 일이다.


그런 왕자는 성장해서 자기의 왕국을 세우고도 선왕의 권위 눌려서 속수무책이다. 자신의 아내마저 그 앞에 무릎을 꿇려서 굴욕을 ‘복종의 미덕’으로 치부한다. 굴욕도 함께하면 좀 나아지는가?


새로운 왕이 진정한 권위를 얻으려면 선왕은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돈이나 권력으로 새 왕을 붙잡아두려면 안 된다. 이는 자신의 권력을 죽을 때까지 가져가려는 어리석음이다.

의식의 전수도 권력의 연장선상에서 하면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아들은 아버지의 불의함에 항거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래야 둘 다 온전하게 살 수 있다. 아버지의 불의함에 대하여 항거하지 못하면 둘 다 평생 그 짐을 지고 가게 되어있다. 아들은 세상을 살아가면 정당한 저항의식 자체가 없어지고, 아버지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잃는 것이다.

아버지를 설득해 보지 못하고, 저항도 해보지 못한 남자는 진정한 아버지가 되기 어렵다.


‘내 눈에 흙이 들어 갈 때까지’와 ‘호적을 판다, 부자의 인연을 끊자’는 말은 부모가 자녀를 논리적인 설득이 불가능 할 때 마지막에 쓰는 공갈협박이다. 이쯤 되면 갈 때 까지 간 일이기에 물러 설 일 아니다.

부자의 인연은 천륜이라서 감정의 각을 세웠다 하더라도 결국 화합을 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속담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이를 증명한다.


온전한 부자관계를 가로막는 것들

오늘날 우리 가정에서 부자 관계의 온전한 인격적인 교류를 막는 것은 단연 ‘권위주의’다.

과거 우리사회가 권위주의가 팽배하여 가정 안에도 침투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라면 어느덧 자신도 그 권위주의라는 갑옷을 입고 만다. 그러면서 한결 같이 자기의 갑옷은 아버지의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인정해 주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


다음으로는 ‘방관’과 ‘방치’다.

방관’은 아들과 부딪히는 것이 여러모로 부담이 돼서 일정한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일이다. 얼핏 보면 평화롭고, 이성적인 관계 같지만 냉랭함이 흐른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내와 자식에게 모두 뒤집어씌운다.


방치’는 자기 자신마저도 어찌하지 못하여 타인에게까지 힘을 미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를 자녀에게 자유로움을 주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러다가 나중에 상황이 호전되거나, 정신이 들어서 관심을 표명하는데, 이미 때늦은 쓸데없는 참견일 뿐이다.


대한민국의 기러기 아빠들은 자녀의 조기 유학을 ‘방관’도 ‘방치’도 아니라고 강변하겠지만 분명 이중에 하나다. '조기유학!'  자녀를 단지 자본주의 전사로만 키울 뿐이다.


온전한 관계의 아들과 아버지

아버지의 올바른 모습을 보이는 일 중에서 가장 소극적인 방법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일이다. 많을 것을 함께 가져가려면 이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남긴다.'는 본질에만 충실하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다음으로 올바른 아버지 상을 보이는 일이다. 이는 혼자 할 수 없다. 아내와 함께 해나가야 한다. 남편이 아내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지켜주고, 의식을 올리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짐을 나누어 질 수 있다.


다음으로 온전한 의식이 있는 집단에 자신의 가정을 열어 보여야 한다. 그래서 수시로 검증도 받고, 정당성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자녀를 노엽게 키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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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다운 글, 생각다운 생각을 접하곤 졸린 눈이 크게 떠졌습니다. 출처는 아래에 있으니 한 번씩 둘러 보세요. 한 사람의 건전하고 정당한 생각은 많은 이에게 전염되어 새로운 문화를 만듭니다. 지금은 늦은 시간이라 이 분의 글을 달랑 이것 하나만 보고 왔지만...볼 게 많을 것 같습니다. 어느 집을 가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쓴 글은 다 읽는 주의이기에 '어쩌다 남의 집에 들러도 하루에 한 곳도 다 못 보는 수도 많습니다. 매번 이렇게 다니지도 못하고...그러나, 이런 분들의 값진 글을 접하면...참~ 좋습니다.>


옮김: 매조지     출처:두 아들 아빠 http://blog.daum.net/kkh6934/11298561
짝퉁출처:http://planet.daum.net/maejoji/ilog/5474536

2007/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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