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엠(M)스트리트/아경방

▶ 친일파 원조

최고의 친일 매국노 - 이성계 가문

해방이 된 지도 63년이 지나 친일파들은 다 죽어 나자빠졌는데도 친일파 논의는 정략적으로만 이용되고 있다. 한국의 친일 논란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최고 친일파인 이성계 가문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면책시켰기 때문이다. 반민특위는 처음부터 일본 왕족이 된 이성계 가문을 배제하였다. 이는 마치 광주사태 책임을 물을 때 전두환을 면책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에서 보듯이 이성계 가문은 외적이 쳐들어오면 만 백성을 버리고 도주하는 것 이 특기였다. 이재황(고종)이란 자는 마누라가 왜놈들 칼에 맞아 죽었는데도 복수할 생각은 하지 않고 1896년 러시아로 망명했다.
아관파천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임금이 처소를 옮겼다는 뜻인데 치외법권 지대인 아관(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것은 사실상 망명이었다. 그리고 1897년 경운궁으로 돌아와서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올렸는데 한 짓이 다시 왜놈들에게 치욕을 당하지 않도록 군비를 강화한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땅굴을 팠다. 러시아 공사관, 미국 공사관, 영국 공사관, 프랑스  공사관 등으로 통하는 땅굴을.
 왜놈들 자객이 쳐들어오면 막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땅굴을 통해 도주하려 한 것이다. 겉은 황제지만 실은 좀도둑이었다. 도둑은 남의 집 몰래 들어가 몰래 빠져 나오려 언제나 도망갈 구멍을 마련해 놓는다.

 본래 고려 왕조를 도둑질한 놈들이라서
500년이 지났지만, 도둑 근성을 버리지 못해 급하면 도망갈 생각만 하지 지킬 생각은 못한다. 그런데 독립협회가 더 문제였다. 독립협회는 겉으로는 황제r권을 옹호했지만 만민공동회를 열어 민권의식을 고취시켰다. 이재황은 겁이 났다. 독립협회가 궁극적으로 공화정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나 해서. 사실 개화파 지식인들은 이씨 왕조를 내버려두고는 어떠한 개혁도 불가능한 것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화정 주장은 역적으로 몰려 죽는 것이므로 말할 수 없었다. 이재황은 결국 사기 쳐서 일본의 도움을 얻어 1898년 독립협회를 무력으로 해산 시켰다. 당시 사료를 보면 일본은 독립협회가 주도하는 개혁이 성공하면 조선이 부강해져서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해진다고 판단하여 해산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였다.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는 일기에서 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오늘의 관보(官報)는 독립협회의 해산과 헌의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면관시킨 칙령을 공포하였다. 이것이 국왕이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배신적인 어떠한 비겁자라도 대한의 대황제보다 더 천박한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정부는 친일 노예 유기환(兪箕煥)과 친러 노비 조병식(趙秉式)의 수중에 있다. 러시아인과 일본인들의 양자(兩者)가 이 사건에 개입해서 의심할 여지없이 모종의 살찐 이권을 위하여 그들의 노예들을 지원하고 있다. 저주받을 왜놈들! 그들이 대한의 마지막 희망인 독립협회를 분쇄시키는데 러시아인들을 돕고 있는 이유를 참으로 알고 싶다.' 
 
                                                                           
(윤치호 일기』5, 1898년 11월 5일)

이것으로 조선 왕조는 끝난 것이었다. 지식인들은 이제 이성계 가문을 포기하였다. 남은 것은 벼슬이나 구하려는 모리배들뿐이었다. 그리고 나라를 지탱할 길이 없던 이성계 가문은 일본 왕족이 되는 것으로 협상을 마무리하고 나라를 팔아 먹었다. 일본과 협상해서 이성계 가문을 일본 왕족으로 하는데 공헌한 자가 이완용이다. 이재황(고종) 이 자는 미국에 흡수된 하와이 왕국의 왕이나 영국에 멸망한 뒤 소멸된 인도 무갈 제국의 황제처럼 될까 봐 전전긍긍하였으나 이완용이 자신을 일본왕족으로 만들려 하는 것에 크게 고마워했다.

1908년 이완용이 이재명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자 어의를 보냈으며 이재명을 사형시켰다. 역사소설에서는 이완용이 이재황을 협박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엉터리이다. 이성계 가문이 보기에 이완용은 충신이었다. 한일합병조약이 공포된 것은 일주일이 지난 8월 29일이었다. 이날 이씨조선의 마지막 군주 이척(李拓 : 묘호는 純宗)은 신민(臣民)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발표하였다. 

 짐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황제가 된 이후 오늘까지 정사혁신에 힘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허약한 것이 고질이 되고 영락(零落)함이 극도에 이르러 짧은 시일 안에 회복시킬 대책을 세울 가망이 없게 되었다. 짐이 결연이 반성하고 결단을 내려 한국의 통치권을 이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해오던 대일본 황제페하에게 넘겨 밖으로는 동양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는 8도의 백성을 보전하게 하는 바이다. 
 너희들 높고 낮은 관리들과 백성들은 나라의 형세와 현재조건을 깊이 살펴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자기 직업에 안착하여 일본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도록 하라. 오늘의 조치는 너희들 민중을 잊어서가 아니라 민중을 구원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관리와 백성들은 나의 뜻을 몸으로 느낄 것이다. 조선은 전제군주국이다. 전제군주국에서 군주의 명령은 바로 법이고 이를 어기는 것은 반역이다. 그러므로 이 조서를 따르지 않고 일제로부터 주권을 찾으려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반역이 된다. 따라서 한국이 이씨 왕가를 군주로 하는 왕국으로 다시 독립하면 심각한 법적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왕실이야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고 변명하겠지만 그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한국이 공화국으로 독립해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이성계 가문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이들을 단죄 대상에서 배제하게 되면 어떠한 친일파 청산 작업도 笑劇이 된다). 

그런데 전주이씨 국사학자들이 우글거리는 대한민국은 이것을 하나도 가르치지 않고 왜놈 욕만 한다. 전주 이씨 문중은 아직도 영향력이 강하다.이씨 조선 500년 동안 과거급제자 50%가 전주이씨였다. 이는 과거가 농간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모든 요직에 전주 이씨가 틀어박혀 있었다. 이에 비해 고려 왕조에서는 왕씨는 과거를 치지 못하게 했다.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은 이씨 왕조를 문화국가라 하며 미화하였는데, 이미 집필 중에 전주 이씨 문중 사학자가 듣고 많은 부분을 써 주었고 사재기를 해서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처음 백 만부 가운데 50만 부는 전주이씨 문중 사재기라는 것이 출판 관계자들의 평이다. 백만 부 정도 나가자 독자적인 브랜드 파워가 생겨 지금까지 2백만 부 이상 나갔다.  방송의 사극은 온통 이씨 조선 미화뿐이 없다.
 그리도 성군이라 떠드는 세종과 정조도 직접 실록을 봐라. 못살겠다고 민란 많이 일어났다. 도대체 겨우 자작 작위를 얻은 이완용(이완용은 우봉 이씨. 우봉은 황해도에 있는 지명이다. 무신 정권을 세운 최충헌은 우봉 최씨. 우봉 이씨는 전주 이씨에서 나왔다. 이씨 중에 전주 이씨에서 분가한 것이 많다.)은 최고 매국노고 일본 왕족이 된 애들은 매국노가 아닌가. 

 조선 처녀 수십만이 정신대로 끌려가는데도
일본 왕족이 된 이성계 자손들은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 많은 재산 가지고 학교 세우거나 다리를 놓는 등 사회에 기여한 바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상놈, 노비 출신 사업가들이 일제시대에 오산학교 숭실학교 등 학교 세우고 가난한 학생들을 공부시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3 1운동보다 한달 앞서 일어난 2 8 독립운동의 주역인 일본 유학생들은 앞으로 독립이 되면 이성계 가문을 반역죄로 처벌할 것을 결의하였다.

 
신기한 것은 왜놈들이 왕족과 귀족으로 삼은 조선 지배층에게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이성계 직계 자손들 일본 왕족으로 깎듯이 우대받았다. 연합군에 항복하기 직전에도 예우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졌는데 고종 이재황의 손자 하나가 죽었다. 일본 애들은 비행기로 시체를 서울에 날라다가 조선 총독이 참여하여 왕족의 예로 장례하였다. 일본이 항복하자 조선총독부는 일본 왕족이 된 이성계 자손을 데리고 일본으로 철수할 계획마저 세웠다. 일본애들이 보기에 한편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친일파라 비난받는 사람들도 거의 모두 조선총독부 비밀 보고서에는 겉으로는 친일이지만 믿을 수 없는 자들이란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만주를 명나라에 팔아먹고 왕이 된 매국노 이성계의 자손들은 그 더러운 혈통을 과시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진짜 일본왕족이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조선 왕족 중에 독립운동했다는 말 들어본 적 있나. 고종 둘째 아들, 친왕 이강이 항일 하려 했다지만 왕이 되고 싶어한 것에 불과하다.

(일부 글에 색깔을 입힌 것과 문단을 고친 것은 행을 줄이려는 의도였습니다.)

출처:이니셜과번호님의 다른글보기 이니셜과번호님프로필이미지

◆ 좋은 글을 피하지는 않지만, 애써 찾아다니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남의 글을 제 블로그에 올려놓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요즈음엔 조금 달리 생각하기도 하여, 다른 시각, 모두와 같이 보고 싶은 글을 게시하는 방을 하나 만들까 고민하기도 합니다. 임의 글을 제 블로그로 옮깁니다. 원치 않으시면 언제든 연락해주시면 소리 없이 내리겠습니다. 00:06

◆ '이씨 조선'이 일본인들이 우리 역사를 폄하하기 위해 부르는 것이라 하여 애써 '조선왕조'라 부릅니다
    만, 이글을 보면 다시 '이씨조선'이라 부르고 싶군요.

'엠(M)스트리트 > 아경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바른 소리  (0) 2009.02.02
▶ 미네르바와 세익스피어  (0) 2009.01.11
▶ 만수와 백수  (0) 2009.01.09
▶ 절제 시대  (0) 2008.12.27
▶ 미네르바-어디로 갈꺼나?  (0) 2008.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