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병은 한자로는 '染病'이라고 쓴다. 전염병(傳染病)의 준말이라고도 하는 데 다름 아닌 장티푸스를 말함이다. 다른 이름으로 장질부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료체계가 지금보다 열악하던 때는 염병이 돌면 새끼줄을 쳐 놓고 왕래를 차단하여 병이 더 번지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고, 치사율이 높아 매우 꺼리던 병이다. 죽을 뻔한 경우의 수가 10번도 더 되는데 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앞서 몇 가지는 예를 들기도 했다.)
1975년 여름이었다.
5월 10일 금호1동에서 중랑구 중화동으로 이사 했다.
내 머리가 이상한 건지 외우지 않아도 이제까지 살던 집의 주소는 저절로 외워지고 지워지지가 않는다. 번지까지. 희한한 일은 또 하나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의 선생님들의 특징과 성함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내가 죽은 다음 머리를 빠개서 뇌수를 조사해보면 보람있는 연구성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고향이 없는 내가(3대 이상을 살아야 고향이라고 정의하는 것 같은데, 그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2살 때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오송리(KTX 오송역 근처)에서 올라와서 스무 살 무렵까지 살던 곳이니 고향보다 더한 곳이었다. 기울기가 보통 이상인 산동네에 살다 태(강)릉 가는 길목의 평지로 이사 오니 좋기는 했는데 지금 동부간선도로로 바뀐 뚝방 근처에는 판잣집이 나래비를 서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우리 집은 판잣집이 아니었다. 70평 정도 됐다. 우리 집은 지금 중화전철역 바로 앞이었다. 중화3동 328-17호. 지금은 감자탕 집을 하고 있더라.
자수성가한 사람의 근본은 가난뱅이라고 하는데 나는 아직도 자수성가를 못한 꼴이 되었다.
바꿔 말해서 스무 살 시절에도 생활의 무게에 짓눌리곤 했었다는 말이다. 그래도 그때의 또래들은 그런 무게를 감당하는 것이 당연한 건 줄 알았던 모양이다. 상황타개와 공간확대에 골몰했을 뿐 현실에 대한 불만 따윈 없었던 것을 보면, (진짜 없었나? 인식을 못 했나? 구분이 안 되기도 한다.) 당시에 나는 한쪽 어깨엔 책이 가득한 가방을 한쪽 어깨엔 화장품이 가득 든 가방을 짜리한 체구에 걸머지고 나가 낮엔 공부하고 오후부턴 명동 삼각동 수하동 무교동 소공동 북창동 일대를 헤매며 화장품 외판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 만원 버스를 타러 집을 막 나서는데, 채 50m도 가지 않아서 뒤에서 "아저씨~~" 하고 부르는 소리가 있어 (내가 무슨 아저씨라고) 뒤를 돌아보니 40대 초반의 사내가 자전거를 타고 오며 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만 19세였지만 그때도 군대에서 불린 소도둑놈이란 닉에 어울리게 숱진 구레나룻로 나이가 꽤 들어 보였는가 싶다. 그랬던 것이다. 사내는 나를 일용직으로 나가는 잡부로 본 것이다. 순간, 번개처럼 스친 생각이 이랬다. '저 치가 날 잡부로 봤다면 하루쯤 인부 노릇을 하는 게 무에 대수냐!!' 난 대책 없이 사낼 따라 가서 생전 처음 노가다를 한 것이다. 단독주택 3층을 짓는 곳에서 시멘트를 이기고 벽돌을 3층까지 나르고 하며 한 달 먹을 물을 그날 다 마신 것 같다. 게다가 좋아했던 막걸리에,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계속되는 설사와 한 여름에 담요를 쓰고 누웠어도 오한에 견딜 수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역촌동 시립병원에 격리 수용되고, 그날 내가 입원한 병실의 바로 그 침대에서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런데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2006/08/31 | |
글: 매조지 그림:D/부자방/에이훠에이/Catalog 22/12 Medic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