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렀다. 악연은 잊어버리고 순전하게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국민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삼
았다. 은행은 제일/동화/신한 등 몇 군데를 거래했었다,
인터넷뱅킹이 활성화되기 전엔 은행별로 프로그램을 따로 깔아야 했고 사용법도 불편했으며 심지어 은
행직원들도 담당이 아니면 모를 정도였고 어떤 은행은 국내 굴지의 제과업체 외에 한두 곳만 펌뱅킹을
쓰고 있을 정도였다. 당연하게 개인으론 처음인 경우가 많았다.
밥 먹고 어지간히 할 일이 없었나 보다. 펌뱅킹(인터넷뱅킹의 전신)을 작든 크든 거래하는 은행마다 설치하느라 시간을 할애했었으니.
1991년 가계당좌 개설을 하는 중에 재산세납부실적, 은행카드소지여부, 결혼유무 등을 점수화하여 자
격을 정했다. 자기 은행에 얼만큼의 이익을 주느냐가 중요할 터였다.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는 중에 직업란에 행상이라 썼다.
직업군에 따라 점수가 높아진다나 뭐라나? 하면서 상업이나 자영업 또는 사업으로 바꿀 것을 권했다. 직업도 마음대로 못 쓰나 하는 생각과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 어떻게 살아왔고 신용을 우선으로 파악
해야 할 은행에서 타성에 젖어 고객에게 직업의 명칭도 바꾸라.
"자격이 안 되어 가계당좌 개설을 못 하면 할 수 없지요.' 그냥 행상으로 갑시다.
그랬다. 약속어음과 당좌수표, 가계수표 20매 각각 쓸 수 있지만, 행상의 규모에 맞게 가계수표(당좌-
500만 원권 20매만) 받아쓰기로 했다.
상업이란 것이 단계가 있어 규모에 따라 행상과 상업과 사업의 구분이 필요할 것이란
단순한(?) 생각과 너, 나 할 것 없이 사업이고 자영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반발과 惡童의 발상에
서 자칭한 것이 오늘까지 이어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상업의 규모는 월 매출이 몇천에서 1억은 돼야 하고 적어도 사업이라 칭할 수 있으
려면 월 3~5억 이상의 매출규모를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상업까진 해 봤는데 발
목을 옥죄는 운명이란 놈의 장난으로 사업다운 사업은 해 보지도 못하고 다시 행상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상계동과 묵동지점을 거래하다 가게를 옮긴 관계로 중랑구에 있는 某 지점을 거래했다.
당시 묵동에 3층 집이 있었고 2가구에 저촉되지 않는 퇴계원에 건영 강남 아파트 32평형을 세 주고 있
었다. 돈이 필요해 은행에 가서 절차를 밟고 여러 가지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라는 대로 해서 가지고 갔
는데 아파트 본사에 가서 뭔 서류를 다시 해 와야 한단다.
그때, 담당 라인에 박 차장이 있었다. 그 친구가 설명한 대로 해 왔음에도 "미안하다. 착오가 있었다."라
며 추가 서류를 요구한 것이다. 박 차장에게 그랬다. 그건 내가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당신이 설명한 대로 난 다 갖춰왔으니 다시 할 필요가 있는 서류는 당신이 해 와야 한다. 설득 반 야단
반을 했다.
나중에 아파트 본사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은 은행 거래를 얼마나 많이 하시기에 은행 차장이 운전기살 대동하고 와서 서류를 대신 발급
해 가지고 가냐?"라고, 확인 겸 놀라움을 표했다. 그것 뭐 별것 아니다. 난 원칙대로 했을 뿐이다.
돈을 빌리는 처지이지만 은행이 어떤 곳인가? 공짜로 빌려주는 것 아니지 않은가?
내가 빌려쓰고 이자 내는 돈으로 월급 주고 운영하며 이익을 창출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떳떳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은행에 갔을 때 마침 점심때면 은행직원들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곤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박
차장이 의정부 신시가지 시청 앞으로 전근을 갔다. 그쪽에도 거래처가 있어 볼일을 보곤 일부러 한 번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 후 얼마, 안돼 죽었다.
인명은 재천이라지만, 나보다 2~3세 정도밖에 더 먹지 않았음에 더 애석하다.
그 몇 개월 전에 고르비의 이마에 있는 문양 같은 것이 커다랗게 이마 쪽에 생긴 것을 봤는데 그게 무슨
병인지 모르겠다. 그의 죽음은 무슨 볼일로 집으로 전화했다가 그의 부인을 통해 들었다.
2006. 08. 24.
그림: 매조지 DB/ PhotoDisc/PD/PD017 세계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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