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곳에서 밝혔지만 내가 지금 하는 일을 시작한 것이 1985년 겨울이었다. 22년 동안 겪었던 인간군상에 대한 이야기
는 해도 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아마, 그건 어느 분야나 대동소이하겠지만 조금 다른 것은 식당업을 하는 이들이 다른 어
떤 직군에 있는 사람들보다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또한 천양지차(天壤之差)이고 운니지차(雲泥之差)며 각양각색(各樣各色)이라 애환도 남다를 수밖에. 그러나 그 애환마저도 즐기고 산 것이 매조지다. 조지는 데엔 일가견이 있다. 어디 한 번 조진 이야
기 좀 풀어 보자.
조선시대 2,000만 남짓했다는 인구 중에 양반이 몇 %였는지는 잊어버려 잘 모르겠다. (무릇 어떤 글을 쓰려면 자료조사
도 해야 하고 그 시대의 정치/문화/사회/경제 등을 아울러 생각하고 미루어 짐작하는 과정을 거쳐야 잡문이라도 값이 있
을 터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도 마음도 없다. 2,000쪽이 넘는 글과 켜켜이 있던 자료는 귀신이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나중에 [매조지의 행상일기]란 제목의 책을 만들 수 있다면 지금 허섭스레기처럼 기록하는 것을 토대로 살을 붙이고
덜어내고 하여 그럴듯하게 꾸밀 수도 있을 터이다. 지금이나 있을지도 모르는 앞날이나 독자에게 잘 보이려고 가식적인
모양새를 갖추진 않을 것이다.] 양반이야길 꺼내는 것은 내가 자라면서 양반은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쌍놈은 눈을 씻고
보려고 해도 보지를 못했다. 그래서, 나는 때론 쌍놈으로 살기로 작정을 했다. 쌍놈이 양반보다 귀한 것이니 귀한 것을 좋
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 터.
아버지의 복장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심지어 한여름에도 넥타이를 꼭꼭 매고 다니시는 아버질 보면서, 뭔가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 할아버지는 쌍놈이었을 것이다.'라고 외치곤 했다. 미래를 볼 수 없는 쌍놈! 난 쌍놈이다. 물론 기껏해야 일기장 정도에 썼을 정도였지만, 그런 영향으로 85년 행상을 시작한 이후로 4년이
지난 1989년 여름까지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정장을 입고 다닌 적이 많았다. 양복은 벗고 일해도 그놈의 새끼줄은 목아지에 언제나 감겨 있었다. 홍릉 근처에 산림청이 있고 산림청 앞 삼거리에 [로터리 불고기]란 곳이 있었다. 홍릉 갈비 쪽으로 4층짜리 세종가든이 거래처였다. 지금은 결혼회관으로 바뀐 초원도 그때는 음식점이었다. 고대 쪽으로 코너에 홍릉(?) 파출소가 있고 그 옆으로 홍능갈비가 있다.
로터리 불고기란 곳에서 주문 전화가 왔다. 30만 원이 조금 넘는 물건을 내려놓고 나니 주인이 내일 결제를 하겠단다. 첫 거랜데 찜찜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식대가 1,200원 고기도 2,500원쯤 했었다.)
장재철 50세.
이게 주인이란 놈이다. 고대 쪽으로 한 정거장 사이로 대동횟집이란 가겔 하나 더 갖고 있었다. 악질 중의 악질이다. 22년 동안 만났던 자 중의 최하층이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외상장부를 만들어 놓곤한 번 들르면 5,000원/10,000원 이렇게 끊어주는 거였다. 게다가 로타리로 가면 대동에 있고, 한 정거장 되는 거릴 그리 오랜다. 종업원은 남은 하나고 마누라
와 아들 내외가 전부였는데 이자들은 실권도 없었지만 아비의 부당함을 은근히 추종하는 것 같았다.
몇 번을 가야 겨우 한 번 볼까 말까 했고, 물수건/야채 등 업자들이 외상값을 받고자 나래비를 서 있곤 했다. 돈을 받으
러 온 사람들이었다. 유심히 보니 장사도 그런대로 됐다. 나는 더구나 그쪽이 route sale코스가 아니라 맘을 먹어야 들를 수 있는 곳이었다. 생각다 못해 틈나는 대로 들러 밥을 먹는 것으로 처리하려고 했는데 웬걸 밥은 주는데 삼겹살 같은 건 내게 팔질 않는 것이다. 이건 도둑놈이 아니라 날강도 수준이다.
결국, 일이 터졌다. 어느 날 들렀더니 마침 카운터에 앉아있었다. 점잖게 말했다.
"수금좀 해 주시지요"
아무 말 없이 외상장부와(외상거래도 합의로 성립되는 것임에도. 제멋대로다.) 5,000원을 내준다. 나도 모르게 소릴 꽥~ 질렀다.
"이게 뭡니까?"
이 작자. 아무 소리 않고 5,000원 지펠 집어넣고 10,000원 짜릴 내 준다. 다시 소릴 질렀다.
"뭐 하자는 겁니까?"
이번엔 10,000원짜리와 장부를 집어넣는다. 열이 뻗쳤다. 시비가 됐다. 책상을 마주하고 서 있던 놈이 갑자기 내 넥타일 잡고 목을 졸랐다. 캐~~캑 꼼짝을 할 수 없었다. 한참만에 손이 놓이고 아수라장이 됐다. 안 되겠다. 놈은 힘도 셌다. 그
리고 힘으로 할 일이 아니었다. 문밖에 나와서 목을 손톱으로 살살 긁었다. 그러면서 112에 신고를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 10분이 흐르고, 20분이 흐르고 보통걸음으로 걸어서 3분 정도 갈까 한 모퉁이에 파출소가 있음에도 웬일인지 꼼짝
도 않는다. 112에 쌍욕을 해 댔다. 그제야 순경 둘이 왔다. 그리곤 나 보고 파출소에 가 있으란다. 장재철 이놈은 끌고 오
질 못한다. 파출소에 한참을 앉아 있으려니 놈이 순경과 같이 들어 왔다. 파출소장과 차석에게 소릴 지르더니 의자를 집어던지고 생난리가 났다. 거기서 내게 죽이겠다고 별 협박을 다 한다. 어찌 된 일인지 파출소장도 그 장한 위세를 부릴 생
각을 못한다. 거친 내 항의에 마지못해 전과조회를 하는데 16절지로 두 장이 넘는다. 전과 28범. 50세 나이에 그렇담 이
건 겨우 잡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조금 있다 마누라와 아들 내외가 왔는데 그들에게 뭐라 뭐라 하니까 짧은 시간에 나
를 영업방해로 고발하는 고소장을 작성해왔다. 순경 하나가 나를 부르더니 청량리로터리 우체국 맞은편에 무슨 병원으로 데려 가더니 난 밖에 있게 하고 의사와 뭔 말을 주고받더니 상해진단서를 끊어왔다. 가면서 내게 우리도 골치가 아픈 놈이다. 운운.., 민중의 지팡이. 웃기지 마라! 그런 건 없었다. 결국은 같이 청량리 경찰서로 넘겨졌다. 막국수,냉면만 하루
2,000명분 정도를 팔던 시절 뜨거운 한여름은 메뚜기 철이었는데 삐삐는 울리고, 어쩔 수 없이 이튿날에야 나올 수가 있
었다. 영업방해로 고소를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법에는 박사였다. 지금은 고소사건이 밤을 새우진 않는 것으로 아는데 모르겠다. 게다가 놈은 집행유예로 가석방되어 있던 상태였던 그는 나중에 내가 합의를 해 줬음에도 끝내 그의 집인 감방으
로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군데의 가게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웃기는 것은 청량리 시장 안의 동도교회라고 규모가 꽤 큰 교회의 집사란다. 목사에게 전화하고, 목사는 경찰서에 선처를 부탁하더라. 교회의 건물이 큰 것과 신을 두려워하고 경외(敬畏)하는 마음은 반드시 반비례하여 멀어진다고 믿는다.나는..
합의를 하기까지 몇 날을 두고 두 아들놈에게 온갖 욕설과 협박이 이어졌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자력병
원 앞 1층 다방으로 두 놈을 불러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당신 아버지가 사람 새끼냐?"라고 마구 소리지르며 야단을 했다. 그래도, 온갖 협박을 일삼던 자들이 찍소릴 못하고 오직 합의만 봐 달라고 사정했다. 결국 외상값과 진단서 뗀 비용 등을 모두 받고 합의를 해 줬다. 그는 감옥, 그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세상엔 별의별 인간이 다 있다. 나도 그 중의 하나다.
지금은 차에 양말과 구두 또는 운동화를 갖고 다니긴 하지만 맨발로 다닐 때도 있다.
정장에서 맨발까지.
의식도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쌍놈다운 쌍놈으로 살겠다.]는 기본 생각도 바뀌지 않았
고...
http://maejoji.tistory.com/entry/◆-맨발에서-정장까지
글: 매조지
그림:F/엔터테인먼트/사진/블업그림
2006/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