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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M)스트리트/돈

◆ 정장에서 맨발까지

여러 곳에서 밝혔지만 내가 지금 하는 일을 시작한 것이 1985년 겨울이었다. 22년 동안 겪었던 인간군상에 대한 이야기
는 해
도 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아마, 그건 어느 분야나 대동소이하겠지만 조금 다른 것은 식당업을 하는 이들이 다른 어
떤 직군에 있
는 사람들보다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또한 천양지차(天壤之差)이고 운니지차(雲泥之差)며 각
양각색(各樣各色)이라 애환도 남다를 수밖에. 그러나 그 애환마저도 즐기고 산 것이 매조지다. 조지는 데엔 일가견이 있다. 어디 한 번 조진 이야
기 좀 풀어 보자.

 조선시대 2,000만 남짓했다는 인구 중에 양반이 몇 %였는지는 잊어버려 잘 모르겠다. (무릇 어떤 글을 쓰려면 자료조사
도 해야 하
고 그 시대의 정치/문화/사회/경제 등을 아울러 생각하고 미루어 짐작하는 과정을 거쳐야 잡문이라도 값이 있
을 터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도 마음도 없다. 2,000쪽이 넘는 글과 켜켜이 있던 자료는 귀신이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나중에 [매조지의 행상일기]란 제목의 책을 만들 수 있다면 지금 허섭스레기처럼 기록하는 것을 토대로 살을 붙이고
덜어내고 하여 그럴듯하게 꾸밀 수도
있을 터이다. 지금이나 있을지도 모르는 앞날이나 독자에게 잘 보이려고 가식적인
모양새를 갖추진 않을 것이다.] 양반이야길
꺼내는 것은 내가 자라면서 양반은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쌍놈은 눈을 씻고
보려고 해도 보지를 못했다. 그래서,
나는 때론 쌍놈으로 살기로 작정을 했다. 쌍놈이 양반보다 귀한 것이니 귀한 것을 좋
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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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복장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심지어 한여름에도 넥타이를 꼭꼭 매고 다니시는 아버질 보면서, 뭔가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 할아버지는 쌍놈이었을 것이다.'라고 외치곤 했다. 미래를 볼 수 없는 쌍놈! 난 쌍놈이다. 물론 기껏해야 일기장 정도에 썼을 정도였지만, 그런 영향으로 85년 행상을 시작한 이후로 4년이
지난 1989년 여름까지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정장을 입고 다닌 적이 많았다. 양복은 벗
고 일해도 그놈의 새끼줄은 목아지에 언제나 감겨 있었다. 홍릉 근처에 산림청이 있고 산림청 앞 삼거리에 [로터리 불고기]란 곳이 있었다. 홍릉 갈비 쪽으로 4층짜리 세종가든이 거래처였다. 지금은 결혼회관으로 바뀐 초원도 그때는 음식점이었다. 고대 쪽으로 코너에 홍릉(?) 파출소가 있고 그 옆으로 홍능갈비가 있다.

 로터리 불고기란 곳에서 주문 전화가 왔다.
30만 원이 조금 넘는 물건을 내려놓고 나니 주인이 내일 결제를 하겠단다. 첫 거랜데 찜찜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식대가 1,200원 고기도 2,500원쯤 했었다.)
 
장재철 50세.
이게 주인이란 놈이다. 고대 쪽으로 한 정거장 사이로 대동횟집이란 가겔 하나 더 갖고 있었다.
악질 중의 악질이다. 22년 동안 만났던 자 중의 최하층이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외상장부를 만들어 놓곤한 번 들르면 5,000원/10,000원 이렇게 끊어주는 거였다. 게다가 로타리로 가면 대동에 있고, 한 정거장 되는 거릴 그리 오랜다. 종업원은 남은 하나고 마누라
와 아들 내외가 전부였
는데 이자들은 실권도 없었지만 아비의 부당함을 은근히 추종하는 것 같았다.

 몇 번을 가야 겨우 한 번 볼까 말까 했고, 물수건/야채 등 업자들이 외상값을 받고자 나래비를 서 있곤 했다. 돈을 받으
러 온 사람들이었다. 유심히 보니 장사도 그런대로 됐다. 나는 더구나 그쪽이 route sale코스가 아니라 맘
을 먹어야 들를 수 있는 곳이었다. 생각다 못해 틈나는 대로 들러 밥을 먹는 것으로 처리하려고 했는데 웬걸 밥은 주는데 삼겹살 같은 건 내게 팔질 않는 것이다. 이건 도둑놈이 아니라 날강도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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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일이 터졌다. 어느 날 들렀더니 마침 카운터에 앉아있었다. 점잖게 말했다.  
 "수금좀 해 주시지요"

아무 말 없이 외상장부와(외상거래도 합의로 성립되는 것임에도. 제멋대로다.) 5,000원을 내준다. 나도 모르게
소릴 꽥~ 질렀다. 
  "이게 뭡니까?"

이 작자. 아무 소리 않고 5,000원 지펠 집어넣고 10,000원 짜릴 내 준다. 다시 소릴 질렀다. 

 "뭐 하자는 겁니까?" 

 이번엔 10,000원짜리와 장부를 집어넣는다. 열이 뻗쳤다. 시비가 됐다. 책상을 마주하고 서 있던 놈이 갑자기 내
넥타일 잡고 목을 졸랐다. 캐~~캑 꼼짝을 할 수 없었다. 한참만에 손이 놓이고 아수라장이 됐다. 안 되겠다. 놈은 힘도 셌다. 그
리고 힘으로 할 일이 아니었다. 문밖에 나와서 목을 손톱으로 살살 긁었다. 그러면서 112에 신고
를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 10분이 흐르고, 20분이 흐르고 보통걸음으로 걸어서 3분 정도 갈까 한 모퉁이에 파
출소가 있음에도 웬일인지 꼼짝
도 않는다. 
112에 쌍욕을 해 댔다. 그제야 순경 둘이 왔다. 그리곤 나 보고 파출소에 가 있으란다. 장재철 이놈은 끌고 오
못한다. 파출소에 한참을 앉아 있으려니 놈이 순경과 같이 들어 왔다. 파출소장과 차석에게 소릴 지르더니 의자를 집어던지고 생난리가 났다. 거기서 내게 죽이겠다고 별 협박을 다 한다. 어찌 된 일인지 파출소장도 그 장한 위세를 부릴 생
각을 못한다. 거친 내 항의에 마지못해 전과조회를 하는데 16절지로 두 장이 넘는다. 전과 28범. 50세
나이에 그렇담 이
건 겨우 잡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조금 있다 마누라와 아들 내외가 왔는데 그들에게 뭐라 뭐라 하니까 짧은 시간에 나
를 영업방해로 고발하는 고소
장을 작성해왔다. 순경 하나가 나를 부르더니 청량리로터리 우체국 맞은편에 무슨 병원으로 데려 가더니 난 밖에 있게 하고 의사와 뭔 말을 주고받더니 상해진단서를 끊어왔다. 가면서 내게 우리도 골치가 아픈 놈이다. 운운.., 민중의 지팡이. 웃기지 마라! 그런 건 없었다. 결국은 같이 청량리 경찰서로 넘겨졌다. 막국수,냉면만 하루
2,000명분 정도를 팔던 시절 뜨거운 한여름은 메뚜
기 철이었는데 삐삐는 울리고, 어쩔 수 없이 이튿날에야 나올 수가 있
었다. 영업방해로 고소를 당하였기 때문이었
다. 법에는 박사였다. 지금은 고소사건이 밤을 새우진 않는 것으로 아는데 모르겠다. 게다가 놈은 집행유예로 가석방되어 있던 상태였던 그는 나중에 내가 합의를 해 줬음에도 끝내 그의 집인 감방으
로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군데의 가게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웃기는 것은 청량리 시장 안의 동도교회
라고 규모가 꽤 큰 교회의 집사란다. 목사에게 전화하고, 목사는 경찰서에 선처를 부탁하더라. 교회의 건물이 큰 것과 신을 두려워하고 경외(敬畏)하는 마음은 반드시 반비례하여 멀어진다고 믿는다.나는.. 

 
합의를 하기까지 몇 날을 두고 두 아들놈에게 온갖 욕설과 협박이 이어졌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자력병
원 앞 1층 다방으로 두 놈을 불러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당신 아버지가 사람 새끼냐?"라고
마구 소리지르며 야단을 했다. 그래도, 온갖 협박을 일삼던 자들이 찍소릴 못하고 오직 합의만 봐 달라고 사정했다. 결국 외상값과 진단서 뗀 비용 등을 모두 받고 합의를 해 줬다. 그는 감옥, 그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세상엔 별
의별 인간이 다 있다. 나도 그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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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차에 양말과 구두 또는 운동화를 갖고 다니긴 하지만 맨발로 다닐 때도 있다.

정장에서 맨발까지.

의식도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근본은 바뀌지 않
았다.
[쌍놈다운 쌍놈으로 살겠다.]는 기본 생각도 바뀌지 않았
고...



 http://maejoji.tistory.com/entry/◆-맨발에서-정장까지

 

 

 

 





글: 매조지  

그림:F/엔터테인먼트/사진/블업그림




200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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