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공판을 맞아 판사님께 드리는 글
존경하는 판사님!
오늘 비록 법정이란 공간에서 인사를 드리게 되어 참으로 난감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만 오늘 이후 검찰이 제기한 공소에 대하여 ‘무엇이 진실인가’를 밝히기 위해 수고하실 것을 생각하니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지난 2월 24일 저의 집과 간디학교에 대한 압수수색이 진행되어 오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정에 서게 된 간디학교 역사교사 최보경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많은 것을 말씀드리기 보다는 역사교사로서 역사교육이 어떠해야 하는가와 진보적인 사회단체 활동에 대한 제 생각을 간단, 명료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역사란 무엇입니까? 비록 짧은 소견이나 역사란 단순히 박물관 속의 유물이나 교과서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인류사회가 걸어왔고, 걷고 있으며, 또 걸어가야 할 인간에 의해 창조되고 가치가 부여된 유형, 무형의 모든 것입니다. 역사가는 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역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하게 됩니다. 따라서 역사가가 어떠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동일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과 입장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때문에 역사를 접하는 모든 사람은 역사가의 역사관에 대하여 ‘이해’와 ‘존중’ 그리고 ‘비판적 사고’를 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비판적 역사이해’ 또는 ‘주체적 역사이해’라고 부릅니다. 저는 간디학교의 역사교사로서 제자들이 스스로의 관점을 세우고, 비판적이며, 주체적으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 줄 것을 늘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다원화되고 다양한 삶의 방식이 확산되는 현재에는 더욱 이 같은 역사이해가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간디학교에 역사교사로 있는 이유는 바로 이 같은 교육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한반도의 지난 현대사는 역사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이해, 비판적인 역사인식을 철저하게 가로막아 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교육의 과정을 겪었고, 해방 후 민족의 분단은 우리 교육에도 그대로 투영되었습니다. 동포를 동포라 부르지 못하고, 형제를 형제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남측은 남측대로, 북측은 북측대로 좌우 이데올로기에 갇혀서 서로를 적대시 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역사교육은 독재체제와 특정 이데올로기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왔던 것을 대다수의 국민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분단에 기초한 역사교육은 자라나는 제자들의 가치관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런 역사이해가 개인과 사회의 가치관으로 굳어 버려 고정관념화 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역사교육이 인간의 삶을 다루는 영역이며, 보다 인간의 삶을 값지고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방통행의 역사가 아니라 소통의 역사이어야 합니다. 평화와 공존, 설득과 자유로운 비판의 역사가 되어야만 올바른 역사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말씀드립니다.
다음으로는 제가 활동하고 있는 전교조와 산청진보연합의 활동에 대하여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것이 뗄 레야 뗄 수 없는 연관관계에 있습니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저는 역사를 전공한 교육자로서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에 무관심할 수 없으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소명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 제자들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한 말 한마디, 그것은 제자들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교사는 책임지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말로만 역사니, 평화니, 통일이니, 생명이니, 인권이니 떠드는 것은 제자들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교사가 자신이 한 말을 실천할 때야 말로 참다운 교사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저는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교조와 산청진보연합에서 지회장과 집행위원장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 아닙니다. 월급도 수당도 없습니다. 늘 밤이 늦어야 집에 들어갑니다. 사랑하는 두 딸과 놀아줄 시간도 부족합니다. 오직 제자들과의 약속, 실천만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확신, 그 믿음 때문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제자들의 인권과 교권을 위해, 오직 참교육을 위해 신념을 버리지 않으셨던 선생님. 그 선생님으로 인해 참교육을 알았고, 전교조를 알았습니다. 저는 전교조를 사랑합니다. 제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전교조의 참교육을 지킬 것입니다.
2000년 6월 13일 분단의 철책을 허물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두 손을 잡고 껴안을 때 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엉엉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았지만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날의 감동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조그만 시골 산청에서 진보연합 집행위원장을 맡게 하였습니다. 분단으로 인한 갈등과 대결의식을 넘어 화해와 통일로 가는 길에 그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티끌만큼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여전히 사회적 약자가 존재하고, 사회적 차별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사회적 약자의 편이 되고 싶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존경하는 판사님!
오늘부터 저는 지금까지 살아온 제 삶에 대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 경찰의 압수수색과 조사 과정의 갑작스런 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경찰이나 검찰 또한 공무에 최선을 다한 것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와 동료 교사들, 그리고 아이들과 학부모님들이 서로 배우고 가르치며 사랑하는, 작지만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공동의 터전인 간디학교는 젊은 시절 인종 차별이 극심한 남아공에서 공동체를 만들어 일찍이 대안 교육을 실험한, 인도의 정치가 마하트마 간디의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위대한 성자, 간디를 떠올려 봅니다. 어찌 감히 평범한 교사인 제가 간디의 삶에 근접할 수 있겠습니까만 저는 그 분을 생각하며 재판에 임하려 합니다. 분노를 버리고 오직 존중과 이해로써 진실을 밝히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제 짧은 생각을 경청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08년 9월 2일 최보경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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