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생각하며 어머니를 모시겠다.'
아버지를 묻고 온 10월 29일 새벽에 쓰다.
육군 병참학교 이병 매조지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지금, 자동차에 있는 英英사전 맨 뒷장에 [아직도 선명하게] 쓰여 있는 글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수없이 덧칠해서 써 놨으니.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머닐 제대로 모시지 않고 있다. 못하고 있다.
한 때는,
'내 어머니가 비록 문둥이 일지라도 클레오파트라하고 바꾸지 않겠다.'라는 김소운 님의 글에 크게 공감하고 그리 살려 무진 애를 썼었는데, 앞서 쓴 글이 <나는 에이즈 환자였다.> 어머닐 모시는데 소홀해진 계기가 되었다. 다시 아버지에 관한 추억을 돌아본다.
1977년 나는 중화동에 살았다. 학원과 체육사를 한 정거장 사이를 두고 운영하고 있었다.
점심은 자전거를 타곤 집에 가서 먹곤 했었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무슨 힘든 일이 내게 있었는가 보다. 아니면, 그냥 젊음을 발산하는 차원이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안방 문을 잠그곤 전축(옛날엔 AUDIO라고 하지 않았다.)을 틀어 놓곤 '디지' 어쩌고 하는 노래 등에 맞춰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 발광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춤의 삼매경에 빠져 있었기에 아버지께서 안방 문을 쾅~쾅~ 두드릴 때까지도 몰랐던 것이다. 잠긴 대문 앞에서 벨을 누르시다, 고함을 치시다 난감해하실 때, 한참 만에 아래층에 세든 집에서 문을 따 드린 것이었다. 어이없어하시며 하시는 말씀이.
"얘가 미쳤나?" 였다.
그때, 내가 속으로 한 멘트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버지, 전 미치지 않으려고 미친 짓을 했을 뿐입니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것이 1977년 8월 29일이었다.
그때, 난 한양대학교에 집결해서 논산행 열차를 타고 입대했었다.
아버지가 당시 협심증을 앓고 계셨는데 치료 약인 '니트로글리세린' 이란 약이 작은 약국은 물론 종로에도 흔하지 않아 제약회사를 찾아다니며 구하곤 했었는데,
'누가 약을 구해 드릴 수 있을까?'
(동생은 고3이었고, 형도 군 복무를 하고 있었으며 누나들은 출가했었다.) 걱정이 앞서 마음이 무거웠다. 어쭙잖은 독립심과 자주성을 앞세워 '군대 가는데 뭔 온 식구가 다 나서요.'라고 한사코 등을 떠다미는 나 때문에 이모님 댁과 우리 식구들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어머니께 들은 바로는) 아버님, 혼자 다시 내게 돌아오셔서 나를 찾으시다가 가슴에 통증이 심해지셔 나무 밑에서 진정을 하고 계셨단다. 이동하는 대열에서 아버지를 잠시 뵌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고 이젠 기억조차 희미하다. 결국은 논산 훈련소를 거쳐 육군 병참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중 자대 배치를 받기 바로 전에 아버지가 돌아 가신 것이다. 그때, 대전에서 서울로 향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뜀박질을 하고 싶었던 절절한 심정이 아직도 뜨끈뜨근하다. 아버지와 결국은 그렇게 이별을 하고 말았다.
이제, 내가 아버지가 된 지도 거의 20년. 아버지의 마음과 자식이었던 내 마음을 생각하며 아들과 딸을 바라본다. 좀 더, 여유있게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완고하셨지만, 이해심 많으셨던' 아버지의 영향일 것이다. 언제든 '인정은 못 해도 이해는 하자'는 생각의 뿌리는 아버지로부터 일터이다.
200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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