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조금만 철이 들면 누구나 알 수 있고, 아는 명제이리라. 톨스토이인가 누군가가 쓴 작품의 내용 중 인간의 삶을 '나무에 올라가 있는 중에 흰 쥐와 검은 쥐가 나무 밑동을 쉴 새 없이 갉아먹어 결국은 인간이 쓰러지는 것으로' 세월이 감에 인간도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음을 묘사한 글을 본 것이 중학교 때쯤인 것 같다.
이제 50대에 들어섰다. 친하고 쉽지 않아도 [죽음]이란 놈과 악수하고 화해하며 좀 더 가까이 가려는 몸짓을 해야 할 것 같다. 사실, 나도 죽기 싫다. 죽고 싶지 않다. 마누라가 숨을 거두면서 '죽기 싫어, 아빠와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라고 했던 말이 간혹 귓전을 때린다. 죽고 싶지 않은 것은 희망 사항이고 인간은 누구나 죽어야 한다. 죽기 싫은 내가 얼마 남지 않은 70세를 내 적정 수명이라고 상정해 놓은 것은 사람이 경제적인 활동을 하고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때 살아 있는 것이지 식물인간처럼 숨만 깔딱대며 생을 연장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천상병 시인의 귀향을 회자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생에 대한 미련을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소이를 잘 이해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을 대변했기 때문이 아닌가?
누구나 그러하듯 우리 나이 때쯤 되면 숱하게 많은 이들을 먼저 보냈을 것이다. 상갓집을 다녀온 횟수도 많을 터이고, 그때마다 자신과는 상관없을 죽음의 의미를 가볍게 또는 조금 무겁게.., 때론 아주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아픔과 무거움에 치를 떠는 형태로 경험했으리라.
내가 죽음이란 놈을 처음 만난 것은 7살 때쯤이다.
어머니가 두고두고 말씀 하셔서 더 기억이 생생하다. 60년대 초 신영균이가 지었다는 금호극장 건너편이 금호 2가였고 금호 국민학교 쪽에 살았는데 (지금도 어렸을 적 살았던 집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다.) 금호 극장 쪽으로 계단이 50 여 개가 넘는 곳이 있다. 거기서 3발 자전거를 타고 마지막 계단까지 굴러 온몸이 피투성이로 병원에 갔는데 어디 부러진 곳 하나가 없었단다.
세월이 흘러 4~5학년 때쯤인 65년 경 변소에서 볼일을 보다 윗집의 축대가 무너지는 기색을 감지하곤 옷도 못 올리며 뛰어나오다 머리만 묻히지 않은 상태로 파묻혀 버린 것이다. 어머니가 그랬다. 빳빳해서(순발력이 있어서) 살았다고. 같은 날 윗집의 할아버지는 개천 준설작업을 하다 무너지는 축대에 깔려 죽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랬다. 비 오는 날 뭔 개천을 파느냐고. 한마디로 실속 없이 부지런해서 일찍 간 경우란다.
3번째 기억은 10살 전후해서 집 앞에 우물이 꽤 깊었는데 아이들과 놀이로 우물에 들어갔다 빠졌다. 겨우 빠져나오고 놀란 가슴을 진정하기도 전에 마루에서 내다보시던 아버지께 심하게 혼났던 기억이다. 이땐 지금보다 사회 분위기가 꽤 험악했던 것을 느꼈는데 윗동네와 아랫동네 아이들이 돌멩이를 던지며 투석전을 할 정도였다. 행녕이란 친구는 나무에 올라가서 내려오다 미끄러져 불알이 찢어지기도 했었다. 자~식 얼라는 낳고 사는지 모르겠다.
절체절명의 목숨이 위태로웠던 사건은 10여 건이 넘지만 길어지는 글을 줄이기 위해 두 개만 더 내놓아 보면.. 1991년 8월의 15톤 덤프와의 교통사고였다. 상계동에 덕정교장이라고 예비군 훈련을 전담하는 부대가 있는데 상계동 당고개역에서 덕송수영장 쪽으로 가려면 부대를 관통하는 도로를 따라가야 한다. 부대가 산마루에 있는데 정상 바로 아랫부분은 기울기가 15도 이상 되는 급경사이며 커브가 급한데 부대공사를 하던 덤프가 위에서 내려오며 내 차를 찍어 누른 것이다.
이 사고로 운전대 창문 쪽의 지지대가 부러지고 핸들이 밀려 무릎이 끼어 나올 수가 없었다. 결국, 덤프 운전자가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쇠 와이어 줄을 덤프와 내 차에 연결해 차를 뜯어내어 나올 수 있었다. 정비공장으로 견인돼 간 차의 부서진 정도로 봐선 운전자는 즉사 내지는 중상일 거라고 수군거렸다는 말을 나중에 차를 인수하러 간 작은 매형에게서 들었다. 상계 백병원에 가서 왼쪽 팔꿈치를 20여 바늘 꿰매고, 무릎에 약간의 통증을 느꼈지만 불과 2~3일 입원하곤 다시 일했었다. 거래처에 대한 의무감 같은 것에 몸을 움직일 수 있는데 그냥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전쟁 중도 아닌데.. 지금 생각하면 좀 미련했다. 하지만 가벼운 교통사고로 환자행세를 하며 오랫동안 병원에 나이롱환자로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물론 경제적인 이익을 앞세우기 때문인 건 나도 안다. 그런데 그것이 아직도 용납되지 않는단 말이다.
하나 더 예를 들면 요즈음 군에서 총기사고가 빈발하는데 제대를 서너 달 남겨놓고 오발사고로 나도 비명횡사할 뻔한 경험이 있다. 80년 5월 전두환의 집권욕으로 이 땅에 피바람이 몰아친 역사는 다 알 것이다. 그 전주곡으로 군에서도 빡세게 야간사격 등으로 몰아쳤는데 행정병이고 뭐고 열외가 없었다. 얼마나 중압감을 느꼈으면 부대 내에서 보초를 서던 후임병이 사격연습을 하던 중 안전고릴 확인 안 하고 격발연습을 하다 그만 실탄이 발사된 거였다. 직선거리로 20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아이들 데리고 유류고 정비작업을 하고 있던 내 머리위를 지나 바로 옆의 담벼락에 유탄이 튀는 거였다. 총소리에 부대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조금 후에야 총탄이 바로 내 머리위를 날은 것을 확인하니 그때야 등에 식은땀이 주~욱~ 흐르는 것을 느꼈다. 내 키가 한 뼘만 더 컸다면, 아마 그때 난, 그래서 키가 짧음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고맙기도 했었다.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니 역시, 나도 죽기 싫어하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겠다. 그러나 죽음을 겁낼 나이는 이미 아니다.
2006/08/19 | |
권 여사에게 다시 전화 온 것이 어제저녁이었다.
일요일이 삼우제인데 한 번 더 수고해 달라고. 흔쾌히 승낙했는데, 아까 낮에 다시 전화가 왔다.
자살한 이의 아들이 찾아와 오랜 시간 많은 이야길 나누었고 "바쁘게 살다 보니 아버님을 챙기지 못했고 불효했고, 그런 아버질 챙겨주셔서 고맙다."라고 하더란다. 둘이 실컷 울었단다. 일요일 아들과 같이 가기로 했으니 수고하지 않아도 된단다. 일요일에 모임도 있고, 노가다도 일정에 있어 둘 중의 하날 선택해야 할 마당에 부담되긴 했었는데 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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