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힘보다 강한 욕망의 굴레..
그리스 신화의 한 토막.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골리스 지방을 아크리시오스가
통치하던 때의 이야기다. 풍부한 물자와 후한 인심, 천혜의 땅이다. 선량하고 부지런
한 시민, 왕은 행복했다. 시민은, 대지마저도 기꺼이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그리고 나라의 경사 하나. 미모의 여왕 에우리디케가 공주를 출산했다. 공주는 아름
다운 어머니를 쏙 빼어 닮았다. 아니 그것을 능가했다. 바로 다나에였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신탁은 장차 다나에가 낳을 아기가 왕을 시해할 것이라
고 예언했다. 비극은 늘 그랬지. 고귀한 신분을 저주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침몰시켰지.
아크리시오스는 절망했다. 이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공주가 장차 나의 목을 따는
친손주의 어머니라니. 그러나 신탁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니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변화시킬 수 없는 일이다.
왕은 예언의 실현을 막으려면 차라리 다나에를 절해고도에 유폐시키는 수밖에 없다
고 생각했다. 어떤 남자의 접근도 허락해선 안 됐다. 왕은 다나에를 눈물로 감금했다.
무쇠를 통째로 녹여서 완벽한 철탑을 완공하고 그 속에 공주를 가두었다. 식수를 제
공할 조그만 구멍을 철탑의 천장에 냈을 뿐이다. 육중한 철탑은 견고한 요새로 한 치
의 틈도 없이 우뚝했다.
딸을 가둘 수밖에 없었던 왕의 가슴은 찢어졌다. 갇힌 이유를 나중에 유모에게서 들은
다나에 역시 자신의 운명과 부친을 원망하고 날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 어떤 슬픔도 철
통 같은 무쇠 탑을 녹일 수 없었다. 설령 눈물이 쇠를 부식시킬 수는 있어도, 철탑은 저
홀로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 제우스가 이 철탑을 발견하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탑 주위를 맴돌던
그가 순간, 천장의 틈새로 아름다운 다나에를 발견했다.
이제 이야기는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그러나 견고한 철탑은 요새 중의 요새. 틈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신의 아버지 제우스도 난공불락의 철옹성 앞에서 절망했다. 그는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서 절치부심했으나 실패했다. 밤마다 전전반측했으리라. 그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었으니.
이때 눈물로 시간을 흘리던 다나에가 하늘의 제우스를 발견했다. 바로 그 순간을 놓치
지 않고 사랑의 신은 순식간에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잠자던 다나에의 정열을 깨웠다.
이제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타오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처음 경험하는 야릇한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흐벅진 넓적다리가 제우스를
향해 절로 벌어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제어할 수도, 아니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제우스는 눈부신 광경에 넋을 잃었다.
그 역시 욕정을 참지 못하고 황금의 정령을 그녀의 다리를 향해 마음껏 벌컥벌컥 쏟아
냈다. 다나에는 황홀경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녀는 제우스의 정랑을 갈증 난 사람처
럼 게걸스럽게 받아들였다. 아니 빨아들였다.
절제할 수 없는 쾌락은, 그녀가 재앙을 잉태한다는 것조차 망각케 했다. 그랬다. 쾌락
이 최고조에 도달할수록 비극은 가깝다. 그것은 죽음의 유혹 같은 것이다. 결국 이 사
실을 알게 된 왕은 다나에와 그녀의 아이를 궤짝에 가두어 망망대해로 띄워 죽음으로
보냈다. 다나에는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운명을 한탄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다나에〉. 이 그림은 제우스와 다나에의 그 쾌락적 합일과 열락
을 관능적으로 포착했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터질듯한 여인의 풍만한 육체를 극단적
으로 클로즈업하여 농염함을 극대화했다. 이처럼 풍만한 허벅지를 경험하긴 어렵다.
상대적으로 가냘픈 종아리가 그것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그리고 사타구니 사이를
비집으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제우스 정랑을 보라. 온통 황금빛이다.
관능은 이렇게 황금빛으로 출렁이며 빛난다. 그는 색으로 황홀한 심리마저 잡아낸 것
이다. 여인은 강렬한 엑스터시에 몸을 맡기고 꿈같은 몽환의 세계에 침몰했다. 한편
클림트는 다나에의 손을 통해서 퇴폐적 아름다움마저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
손을 잘 보라. 무엇인가 긴 막대 같은 것을 살짝 감아 쥔 오른손은 긴장되어 떨릴 듯하
다. 물론 그 대상은 그림 속에서 생략되었다. 그러나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벌어진 입,
쾌락에 지펴 감긴 눈은 제우스의 성기를 감아 쥐고 탐닉하는 중이다. 그리고 분명히 그
녀는 왼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애무한다. 그녀는 자위 중이다. 그녀는 이렇게 손으로 말
한다.
<살로메 혹은 유디트>
'유디트'는 '키스'만큼이나 잘 알려진 클림트의 대표작이다. 클림트의 그림을 조금이라
도 알고 내 홈페이지에 들렀던 사람이라면 이 그림에 대한 소개가 없는 걸 보고 조금은
실망했거나 의아해했을지도 모르겠다. 클림트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그의 그림을 더
많이 소개하고 싶은 생각에서 이 홈페이지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나만의 색깔을 갖고 싶
었다고 한다면 그 이유가 설명될까? 나는 이곳에 '키스'처럼 잔잔하면서도 오래도록 기
억될 수 있는 그림들만을 담고 싶었다.
'유디트'라는 작품은 뭔가 나만의 흐름에서 벗어난 것만 같아서 소개하는데 자꾸 망설
임이 생겼다. 하지만 '유디트'라는 작품을 기대하고 온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유로 '유디트' 대한 내 느낌을 적는 대신에 이주헌 님의
'클림트'라는 책에 소개된 글을 그대로 옮겨놓는다. 클림트의 요부상을 가장 잘 대표하
는 그림은 뭐니뭐니 해도 '유디트' 연작이다.
유디트는 유명한 이스라엘의 애국 여걸.
그래서 그녀는 서양미술사에서 오랫동안 비중 있는 소재로 무수히 다뤄졌다. 그러나
이 애국 여걸이 클림트의 그림에서는 마치 마약에 취한 듯 몽롱한 표정의 요부로 돌변
했다. 현양해야 할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않은, 그저 남자에 굶주린 악녀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특히 유디트I은 액자에 유디트란 글자가 박혀 있음에도 대중들 사이에서 살로메를 그린 그림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세레요한의 목을 벤 고대 요부의 인상이 더 강렬히 풍기어왔던 까닭이다.
유디트 연작을 보면 모두 주인공의 눈동자가 풀려 있다. 그리고 앞가슴도 공통으로 드러내놓고 있다. 옷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시스루'이거나 하늘하늘 나부끼는 관능적인
것이다. 온몸으로 자신의 에로티시즘을 발산하는 여인. 게다가 그녀의 손에 들린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는 적의 것이라기보다는 연인의 머리 같다. 머리를 잡고 있는 손은 섬세하기 이를 데 없고, 그 손으로부터 일종의 끈끈한 애정마저 흘러나와 화면 전반에 기괴한 분위기를 더한다. 그러니까 마치 사체애 환자처럼 유디트는 죽은 적장의 머리를 애무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도 유명한 그 키스>
키스, 그 짧은 순간의 영원함을 위해 짜릿한 키스의 느낌처럼 내게 그런 충격과 여운
을 주었던 그림이다. 그리고 클림트라는 화가에 대해서.. 그의 그림, 생각, 느낌들에
대해 관심을 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준 그림이기도 하다.
벌써 한 세기 전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영원한 사랑의 이미지로
서 남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그림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키 작은 풀꽃이 만발한 언덕 위에 두 연인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 서 있다. 짧은 순간에 도취하여 지그시 두 눈을 감은 여인 하지만 그 순간의 감흥이 얼마나 큰지는 말려들어
가는 손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가운은 마치 후광처럼 짧은 순간의 감흥을 더해주
고 두 사람은 하늘을 향해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하나인듯 하지만 결국
엄연히 다른 둘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은 패턴화된 장식을 통해서다.
남성의 옷에는 직사각형의 장식을 넣어서 남성성을 드러냈고 여성에게는 둥근
원형의 장식을 넣어서 여성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둘러싼 큰 가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성의 상징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남성 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이 동시에 존재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남성 안에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진정한 화해.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이해와
존경을 통해서만이 진정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궁극적인 화해의 이미지는 입맞춤인 것이다.
이 그림을 통해 클림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남성과 여성의 화해를 통한 영원
한 사랑이다. 하지만, 그건 결코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신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클림트 자신과 에밀리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처럼. 이 그림은 분명히 사랑을 통한 화해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결코 따
뜻하거나 희망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관자를 향해 아니 세상을 향해 매몰차게 돌려져 있는 남자의 머리와 창백한 얼굴로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닫아버린 듯 꼭 감은 두 눈의 여자의 얼굴에서 오히려
소외감과 우울함을 느끼게 한다.
탄생, 희망, 회한, 죽음.., 삶은 결국 '절망'이라는 단어로밖에 표현될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끝없는 반복.. 태어나고 꿈꾸면서 성장하고 회한으로 늙어가고
고통 속에 죽는 것..,
그게 삶인 것을.
삶이 이렇게 고통스러움에도 사람들은 애써 죽음을 외면하려 하고 오래 살기를
원하는 것은 또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그토록 끈질기게 존재함(살아있음)에 집
착하는 이유는 뭘까?
고요히 눈을 감고 잠든 어린 아이(아마도 여자 아이겠지.)와 아이를 안은 젊은
여인. 그녀는 마치 꿈꾸듯 세상을 향한 두 눈을 꼭 감은 채 서 있다.
젊음, 희망, 밝음의 이미지를 품고 있지만, 전혀 사실적이거나 현실적으로 다가
오지 않는다. 그리고 약간의 간격을 두고 늙은 여인 하나가 서 있다.
검게 그을린 피부와 마른 몸에 어울리지 않는 불룩 나온 배를 하고 뭔가 고통스러운 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있다. 마치 죽음이 바로 목전에 와있는 사람처럼.., 늙음, 절망, 어둠, 죽음의 이미지를 품고 있으며 무서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과정들을 고스란히 한 폭의 그림에 담아낸 이 작품을 난 참 좋아한다. 비록 삶을 절망으로 표현하고 있을지라도 그건 엄연한 사실이고 나도 그 과정들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으니까.
클림트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을 잠깐 살펴보면, 만성적인 정신질환에 시
달리던 누이와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삶에 대해서 특히 여성의 삶에 대한 진지
한 고민의 과정 흔적으로서 이 그림이 그려졌다고 한다. 사람은 이렇게 뭔가 아
픔을 하나씩 경험하면서 성장하는 걸까
-그의 스타일 -
복잡한 삶을 초월하며 산다는 것은..
복잡한 삶을 초월하며 산다는 것은.. 이 그림에 대한 클림트의 어떤 설명도해지지 않
고 있기 때문에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보는 사람의
느낌에 따라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고 그 어떤 해석도 그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부담감에 앞서 그냥 그림을 한번 보자.
Scotlet성의 식당 벽을 장식했던 이 그림들은 클림트가 이전에 그렸던 작품들과 어떤
연관성을 찾기가 힘들다. 아직 내 홈페이지에 소개하지 못한 그의 초기작품을 보면 신
화적인 요소(고전주의 화풍의 영향으로)를 그림의 주제로 많이 사용했는데 유독 이 그
림에서는 스토리보다는 장식성에 치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들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삶의 면면들을 표현하고 있고 그 안
에 꿈꾸듯 서 있는 무희와 두 연인은 삶을 초월하여 체념한 듯 서로에게 집착하며 서
있다. 이러한 조각그림들(여기 소개된 것 이외에도 여러개의 그림들이 있다)이 모여
서 하나의 프리즈(벽에 붙이는 띠장식을 의미)를 이루는 것이다. '키스' '사랑'에 대한
클림트의 집착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