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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

* 경찰은 우리의 자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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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우리의 자식(?)이다. 검찰은 우리에게 뭔가?

(이 글은 1999년도 다른 사람의 일을 봐 주러 인천 법원으로 검찰청으로 중랑구청으로 뛰어다닐 때 쓴 글이다. 자신의 앞가림도 못 하면서 행정관청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의 일을 봐주러 돌아다니던 미친 세월이 있었다.)


 

* 집 앞에서 불심검문 당한 이야기


1991년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중랑구 묵동 240-1*1호에 거주하는 나는 그때도 지금 하는 식품 행상(?)을 하고 있었다. 미니 2층의 단독주택을 사들여 증축한 3층짜리 주택이었는데, 반지하인 1층을 창고로 쓰고 2층은 세를 주고 3층에 거주하였다.

오다가다 마주치는 순찰차 근무자들이 '사장님, 운운하며 파출소에서 쓸 고추장, 된장, 간장 등을 지원해 주기를 몇 차례 청하였는데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경찰에 대해 그렇게 심한 거부감이 없던 때이기도 하여, 순순히 그러마 하고 반승낙을 하고는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더구나 파출소로 자기들이 원하는 물품을 갖다 주기를 원하는 그네들에게 '가져다 바치기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하루는, 배달을 가다 순찰차와 마주쳤는데, 다시 '사장님, 어쩌고, 하며 도와주기를 청하는(?) 것에 "집으로 오소." 하고 지나쳤는데 배달을 다녀오니 근무시간에 순찰차를 끌고 왔다.
고추장 17kg, 된장15kg, 간장 18kg을 각 1통씩 순찰차에 실어 주었다. 그런 후로 한 달에 한 번 꼴로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네들에게 수개월에 걸쳐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가 집 앞에서 정복을 입은 파출소 직원에게 기가 막힌 봉변을 당한 것이다.
 

 어느 땐가는, 새내기 직원을 보냈기에 고추장, 된장만 주었더니 '간장은 안 주느냐?'라고 아주 당연하게 자기 물건을 가져가는 것처럼 구는 것이 보기도 싫었고, 집 근처 간이시장에 단골로 가던 정육점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예의 이야기가 거론되었고, 그 아저씨 왈 , "버릇을 잘못 들였구먼. 한 번 주면 계속 와. 딱 자르면 그런 일이 없어요." 하는 충고와 당시의 물건의 원가로 5만 원 정도 되는 물품을 번번이 무상제공 하던 것에 회의를 느껴 "다음부터는 원가는 주고 가져가라." 한 것이 화근이었다.


 "원가는 주고 가져가라"라는 통고를 하고 한 주일쯤 지난 후에 대문 앞에서 물건을 싣고 있는데 (집사람과 6세, 3세의 아들과 딸이 같이 있었다.) 정복을 입은 순경 박종무가 대문 안을 기웃거리는 것이었다. (내 집에 볼일이 있으면 주인이 문 앞에서 일하고 있는데 주인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 당연지사 일진데, 대문 안을 계속 기웃거리고 있었다) 못 본체하고 땀을 삘 삘 흘리며 물건을 싣고 있는데 갑자기 내게 불심검문을 해야겠다는 것이다.  

기가 찬 내가 "여보, 내 집 앞에서 불심검문이 뭐라는 거요.?", "당신 어디서 나온 거야." 하는 나의 항의에는 대답도 안 하고 순경 박종무는[8년이 지난 지금도 그놈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다. 3~4년 전에 들으니 한독약품 자리에 서초동 꽃동네 사람들을 포함한 조합아파트가 들어서는데 (7갠가 9개의 조합이 연합한 곳이었는데 그중의 한 곳의 조합장인가 한다.)는 소릴 다른 조합장한테서 들었다.]- 경찰관 직무집행법 제? 몇조 운운하며 주민등록을 보이라는 억지를 계속하고 있는 터였다. 
2~30분을 고성이 오갈 정도로 옥신각신하다 그는 어쨌든 근무 시간이고 나는 밀려 있는 배달의 계속되는 지연으로 생업에 타격을 입는지라 할 수 없이 주민증을 보이고서는 일단락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주 더러운 기분에 치를 떨었지만, 곧 바쁜 일과로 잊고 말았다. (그때는 일이 고되어

자면서도 "어구 다리야! " 하는 내가 지르는 잠꼬대를 내 귀로 들으면서 자곤 했었다) 

2~3일 후에 창동 언저리를 돌고 있을 때 (업무가 지금도 그렇지만 일종의 Rute Sale이다) 집사람이 급히 호출하는 것이었다. 묵동 크라운 제과 전 골목의 4번째에 있는 집에 백차(순찰차)가 사이렌을 요란스레 울리며 들이닥쳐서는 "간장을 제조한다는 112신고가 있었다. "라며 창고를 보자고 하여 창고를 다 보여 주었는데 2층 계단을 올라가는 창고만 열쇠가 없어서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얼마 전에 집에 도둑이 들어 건넌방에 아이들 저금통까지 쓸어가고, 앨범까지 펼쳐보고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열쇠뭉치도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 (건넌방에 재우던 아들을 그날은 안방에서 같이 재웠기에 아들이 다치지 않은 것만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성가셨고 귀찮음만 당했었다. 동네에서 (당시에) 4년이 넘도록 같은 일을 했고 우리 집에 세든 가구가 3가구나 되었으며, 그동안 파출소의 직원들이 고추장 등을 가지러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에서 무허가로 간장을 제조했다? 

 귀가 차기도 했지만, 겁이 많았고 순진한 집사람이 순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들이닥치니 놀라서 그냥 "예~~ 예" 했겠다. 집사람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마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설사 마약제조를 했다고 해도 영장 없이 어디 함부로 문을 따 주느냐고 야단을 치고는 박종무를 바꿔서는 "당신, 어디서 나왔어 ? "하고 따지니 밖에서 일 보는 나를 무조건 들어 오란다.
집사람과 박종무를 번갈아 바꾸며 계단 밑의 창고를 봐야겠다는 놈에게 '반은 샤시이고 반은 간유리인 창고 문을 깨고 보라'라고 하며 육두문자로 쌍욕을 해댔다.
일하는 사이사이 파출소의 소장 놈과 차석 그리고 황 순경 홍 순경 등의 근무자를 바꿔 240- 1*1에 매조지인데 "이게 무슨 짓이냐?"라고 따지니 새로 온 박종무가 잘 모르고 그런 것 같다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후에도 두 번이나 더 사이렌을 울리며 집에 와서 행패를 부렸다.
 
집에 들어오자니 일이 엉망이 되겠고, 분을 삭이고는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21:00 되었다. 

 죄 없는 집사람에게 주의를 시키고는 (너무나 여리기만 했던 WIFE는 92년 3월 급성골수성 백혈병에 걸려 1년을 고생하다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의 놀람이 원인이 아닌가 하는 모자란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중랑경찰서(그때는 태릉경찰서였다.) 무전실에 전화해서는 묵동 240-1*1호에 매조지인데 순찰차를 보내라고 요구하니 22:00가 조금 넘어 안면이 있는 황 경장( 이 자는 40대 후반쯤이었다.)과 홍 순경(때가 덜 탔고 30대 초반이었다.)이 대문에 들어서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들으라고 아주 큰 소리로 "당신들 뭐 하는 것들이냐!?"라고 소리소리 질렀다. "백배사죄하는 놈들에게 낮에 행패를 부렸던 자들이 왜 오지 않았느냐?" 라고 추궁하니까 '근무교대 시간이 22:00란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그래도 낯짝은 있어서 근무 교대하고 다른 놈들을 보낸 거다. 더러운 놈들. (지금 정도만 세상 물정을 알았으면 다음 날이라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을, 그땐 너무 순진했었다. 억울하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이가 갈릴 정도다.
박종무는 아직도 중랑경찰서에 근무하는지 모르겠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바람에 들리는 소리에 중랑에 있다고 했다.)


순경 놈들 그런 놈들이다.
친구 중에 가락동에서 파출 소장하는 놈과 강서에서 정보과 형사 하는 자, 성남 등지에서 경찰의 녹을 먹는 학교와 군대 동기들이 서넛 있다. 기가 막힐 일이 많지만 한 번에 모두 털어놓을 수는 없겠다. 

 위의 사례를 애써 밝히는 것은 경찰에 대해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닌 내가 왜? 경찰의 수사권을 비롯한 검찰에서의 경찰의 독립에 쌍수를 드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경찰이 순사로 남아 있지 않고 정말 시민의 진정한 보호자며 친구로 남기를 바란다면 경찰 개개인의 자질향상과 의식개혁을 비롯한 구조적인 집단의 병폐 등을 개선하려는 내부의 개혁 의지와 표창원(경찰대학 교수) 등을 비롯한 자존심이 충만한 분들의 활약도 필요하지만, 올바른 시민의 아낌없는 지원이 있어야 "우리의 경찰이 시민을 적으로 보지 않고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느 날엔가는, 시민을 위한, 시민의 경찰이 될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과 지원이 그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신념에서 예쁘지 않은 그들을 지지하는 것이다. 

권력기관의 수족이라는 타성에 젖을 수밖에 없는 검.경의 구도를 깨버리고, 경찰! 그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그들이 지금처럼 제멋대로 일 때 다시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노력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약속했듯이 44년을 살아오면서 경찰과 좋지 않았던 악연을 모두 까발리겠습니다.
이것은 단지 경찰을 비난하기 위한 것만이 아닌 "정말 보기 좋은 모습의 경찰이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강력한 희망이며 나름대로 애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진정한 부모들이 탕아가 된 자식이 돌아올 때 받아주지 않을 부모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 시대에 경찰은 탕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식(?)인 것도 분명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
나라를 사랑하면 건전한 인격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1999년 6월 11일 새벽


(10년 후인, 20008년 8월 현재, "경찰 수사권독립 반대하는 견해로 돌아섰습니다. 경찰의 수준으로 아직 멀었다"라는 생각입니다.)



글; 매조지     그림:D(만물창고)/부자방/에이훠에이.코렐/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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