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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M)스트리트/돈

* 보수와 이혼 달(月)의 끝마다 습관적으로 내뱉는 '어라! 벌써 끝이네!' 하는 감탄사라니.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에 대한 아쉬움인가? 해는 지고 갈 길은 먼데, 안간힘을 써도 제자리인 것에 대한 자조인가? 시스템화를 어느 정도 갖춰 갈 때 느낀 것이 돈은 남이 벌어 주는 것이지. 혼자서는 한계가 분명해진다는 명제였다. 1+1=2가 아니고, 100이고 1,000이고 100,000이고 10ⁿ 승이다. 1-1= 그야말로 0 이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0 이다. 한 때는, 그 하날 잘 만들어 10의 49승까지라도 만들 요량이었다. 이젠 포기하고 0 에서 다시 시작한다. 컴퓨터가 이진법으로 + , - 만 할 수 있는데 곱하기와 나누기 등의 연산을 엄청나게 빠른 시간에 할 수 있는 것도 보수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보수는 적은 수.. 더보기
* 상도(商道) 장안동 경남호텔 근처에 '동해~' 어쩌고 하는 제법 규모가 있는 낙지 전문점이 생겼다. 중랑구민회관 근처에 있 있는 거래처에서 소개했다. 자신의 선배란다. 그런데 이어서 하는 말이 가관(可觀)이다. 내가 공급하는 특정물품의 가격을 자기에게는 현재 공급하는 가격보다 덜 받고 새로 가게를 여 는 선배에게 '덜 받는 만큼이나 그 이상을' 더 받으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거절을 했다. OPEN 하기 수 일 전에 주문을 받아 왔는데 자신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다고 거래를 끊고 다른 업자를 수소문해서 줄을 대었다.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났 다. 어느 정도의 물건이 어떤 경로로 들어 오는지 익히 아는지라 간단한 설득으로 거래하고 있다. 애당초에 소개했던 후배 인가 하는 작자의 이야긴 입 밖에도 내지 않았 다. 그보다 더.. 더보기
◆ 거목 당고개 역에서 노원역으로 내려오다 보면 노원역 오른쪽으로 거목이란 식당이 있었다. 노원역과 맞닿아있는 건물의 2층이었다. 허허벌판에 대단지 아파트가 막 조성되던 90년대 초였다. 유난히 부지런을 떨었던 나는 다른 이들이 6~7시면 끝내는 장사를 자정이 가깝게 극성을 떨며 돌아다녔다. 30대 후반의 나이였던 난 30대에 이루어야 할 목표를 나름대로 정하고 있었던 거다. 아파트 건축현장마다 '함바'라고 불리는 식당이 있었다. 지금처럼 시스템이 정비되어있지 않던 관계로 떼어 먹히는 경우가 간혹 있었지만 그곳에서 소비하는 물량은 대단했다. (지금은 식당 운영하는 자가 지급을 못 하면 하청 또는 원청업자로부터 회수할 수 있다.) 당시에 나는 거래처를 학점 멕이듯 A+/A 등으로 외상매출금 잔고와 경영자의 마인드 .. 더보기
◆ 국민은행 02 세월이 흘렀다. 악연은 잊어버리고 순전하게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국민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삼 았다. 은행은 제일/동화/신한 등 몇 군데를 거래했었다, 인터넷뱅킹이 활성화되기 전엔 은행별로 프로그램을 따로 깔아야 했고 사용법도 불편했으며 심지어 은 행직원들도 담당이 아니면 모를 정도였고 어떤 은행은 국내 굴지의 제과업체 외에 한두 곳만 펌뱅킹을 쓰고 있을 정도였다. 당연하게 개인으론 처음인 경우가 많았다. 밥 먹고 어지간히 할 일이 없었나 보다. 펌뱅킹(인터넷뱅킹의 전신)을 작든 크든 거래하는 은행마다 설치하느라 시간을 할애했었으니. 1991년 가계당좌 개설을 하는 중에 재산세납부실적, 은행카드소지여부, 결혼유무 등을 점수화하여 자 격을 정했다. 자기 은행에 얼만큼의 이익을 주느냐가 중요할 터였다. 필요.. 더보기
◆ 맨발에서 정장까지 중랑경찰서를 깃점으로 박외과 쪽으로 한성양복점이 있었다. 지금도 물론 있다. 지금은, 성격이 좀 바뀌었다. 세탁체인점을 병행해서 한다. 90년대 초에 월플 등의 무인세탁소가 대학가 주변부터 하나 둘 생겨나더니 핵가족화와 급격한 가정붕괴 등으로 나 홀로 가정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세탁소와 옷 수선 등의 영역을 합친 세탁체인점이 번성하고 있다. 심지어 운동화 세탁도 신발 빨래방이란 이름으로 대행해주는 업체도 생겼다. 레디메이드가 판을 치는 세상 변화의 물결에 양복점도 하나둘씩 도태되고 생존을 위해 세탁체인점을 병행하는 곳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명동 근처에서 기업체 임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제법 큰 양복점을 운영하던 친구가 있었다. 잘 나가던 친구가 사업을 접은 게 2000년대 초입이었다. 시대의 트랜드는 .. 더보기
◆ 정장에서 맨발까지 여러 곳에서 밝혔지만 내가 지금 하는 일을 시작한 것이 1985년 겨울이었다. 22년 동안 겪었던 인간군상에 대한 이야기 는 해도 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아마, 그건 어느 분야나 대동소이하겠지만 조금 다른 것은 식당업을 하는 이들이 다른 어 떤 직군에 있는 사람들보다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또한 천양지차(天壤之差)이고 운니지차(雲泥之差)며 각양각색(各樣各色)이라 애환도 남다를 수밖에. 그러나 그 애환마저도 즐기고 산 것이 매조지다. 조지는 데엔 일가견이 있다. 어디 한 번 조진 이야 기 좀 풀어 보자. 조선시대 2,000만 남짓했다는 인구 중에 양반이 몇 %였는지는 잊어버려 잘 모르겠다. (무릇 어떤 글을 쓰려면 자료조사 도 해야 하고 그 시대의 정치/문화/사회/경제 .. 더보기
◆ 국민은행 01 이 글은 아래 링크해 논 글과 연관된 이야기다. http://maejoji.tistory.com/entry/◆-친구-2 위의 글처럼 600만원을 신중앙금고에서 빌리려고 했으니까 국민은행 기존 대출금이 한 400 만원정도 되었을 것이다. 국민은행 명동 본점에서의 일이다. 소유주가 형님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차입을 하는 것이 아니고기존의 대출금을 갚는 판이었다. 게다가 출발하기 전에 문의 하고 나섰다. "대출인이 형님으로 되어 있고 갚으러 나가는 사람은 동생이다."라고, '증빙할 수 있는 신분증과 서류를 무엇 무엇을 해 가지고 오면 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지금은 일반 지점에도 개인 의자가 있는 곳이 많지만, 그때 만해도 시내지점의 고객응대 수준은 우스울 정도였다. 그런데 본점은 역시 달랐다. 규모도 규모고.. 더보기
◆ 삐삐 한 때 유행했던 '말광량이 소녀 삐삐'를 말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휴대폰이 일반화 되기 전에 있었고, 지금도 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쓰는 '삐삐'라 불리는 무선호출기를 말하려는 것이다. 내가 무선호출기를 쓴 것은 아마도 1985년 말이나 1986년 초쯤 일 것이다. 당시에 학원을 하다가 결혼하면서 직업을 전혀 생소한 지금 하고 있는 일로 바꾸고 얼마 안 되어 영업활동에 필요 했기 때문이다. 그때만해도 을지전화국에서만 취급을 했으며 신청하고 평균 3개월을 기다려야 차례가 돌아오던 시절이었다. 일명 삐삐가 처음 사용되던 초창기에 있었던 이야기다.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다.(친구 의 이야기다. 믿어 주라!) 유흥업 소에서 아가씨를 끼고 술을 마시 던 차에 장난기가 발동한 친구가 술을 마시던 중 울린 '삐~삐.. 더보기